‘반도’, ‘부산행’의 속편으로 이게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부산행>은 세계적으로 대히트한 한국산 좀비 영화였다. 그 연결성 때문에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연상호의 <반도>를 보러 오는 관객들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역병의 시대에 거둔 흥행 성적을 보면 그 기대는 타당했다. 하지만 <부산행> 유니버스가 과연 그렇게까지 재미있는 곳인가? ‘<부산행>의 유니버스를 공유하는 좀비 영화는 그렇게까지 큰 기대가 되는 프로젝트인가? 생각해보자.

일단 <부산행> 유니버스를 공유하는 영화는 이미 있다. 프리퀄이라고 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 영화 <서울역>이다. <부산행>처럼 사랑받지는 않지만 장점이 많은 작품이다. 하지만 공유하는 독창적인 유니버스<부산행><서울역>이라는 두 영화의 장점에 해당되지 않는다. 사실 이 두 영화들은 굳이 연결되지 않아도 된다.

연결된다고 특별한 여벌의 장점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부산행>은 화학물질의 유출로 한반도가 좀비 소굴이 되었다는 설정 때문에 인기있었던 건 아니다. 로메로 좀비들은 어느 나라에 가든 어떻게 만들건 다 비슷비슷하다. 하지만 달리는 열차 안에서 좀비들이 들끓는 설정은 아주 드물었고 <부산행>이라는 영화에 차별성을 부여했다. 하지만 이건 같은 유니버스 안에서 반복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서울역>의 장점도 유니버스의 개성과 상관이 없다. 그보다는 한국 사회를 극단적인 냉소와 혐오의 눈으로 바라보는 연상호 애니메이션 영화의 개성이 더 중요하다. 이 영화를 연상호 유니버스에 속해 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이 작품을 같은 세계관 공유라는 의미를 담은 <부산행> 유니버스 영화라고 부르는 건 큰 의미가 없다. <서울행>의 냉소주의를 대자본을 잔뜩 퍼부은 <반도>에 가져오는 건 그냥 불가능하고.

그렇다면 <반도>는 어떤 영화인가? 줄거리를 보자. <부산행> 이후 휴전선 밑 한반도는 폐허가 되었다. 강동원이 연기하는 주인공은 금괴와 돈이 든 트럭을 회수하러 왔다가 두 딸 아이와 함께 좀비 소굴에서 살아 버티고 있는 이정현의 캐릭터를 만난다. 주변에는 좀비들과 함께 고립된 동안 맛이 간 군인들이 널려 있다. 이들이 한반도를 벗어나려면 좀비들과 군인들을 피해 트럭을 인천항까지 데려가야 한다.

그러니까 한반도 배경에 좀비가 나오는데 캐릭터와 내용, 설정은 <매드 맥스: 로드 워리어>, <매드 맥스: 비욘드 선더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조금씩 가져온 것 같은 영화이다. 이런 영화를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이게 최선의 선택일까? <부산행>은 비교 대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반도>는 장르 고전의 뒤를 졸졸 따른다. 그리고 그 고전이 스턴트와 재래식 특수효과로 달성한 그림을 CG로 채운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부산행>과 같은 에너지와 창의성을 <반도>에 붓는다면 아무래도 덜 튀는 영화가 나올 수밖에 없다.

여기엔 또다른 문제점이 있다. 이건 대부분의 한국 장르 영화가 공유하는 것인데, 한국 영화에서는 세계와 캐릭터가 장르의 전형성에 깊이 들어가면 어색해지고 민망해지는 구석이 있다. 좀비 역병이 막 시작된 초반을 다룬 <부산행>은 이 문제가 덜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좀비 <매드 맥스>의 세계가 된 <반도>는 모든 게 계속 어색해진다. 이 영화에 나오는 대사 3분의 1 정도는 실사 영화의 대사보다는 만화의 말풍선에 더 잘 어울린다. 그리고 배우와 감독 모두가 그 사실을 아는 것 같다. 패턴이 보인다. 아주 장르적인 상황이 지나가면 특히 남자 캐릭터들은 일부러 전형적인 아재처럼 굴기 시작한다. 그렇게 하면서 그 어색함을 털어버리고 싶은 것처럼.

어떻게 보면 이 영화의 한국성은 장르성에 대한 알리바이이다. 그 때문에 여전히 만만치 않은 한국적 설정을 투여했지만 이질감 없이 장르 재료들과 어울렸던 <부산행>과는 달리 조금씩 따로 놀고 힘을 준 티가 난다. 그렇다고 해서 없어도 되는 것을 억지로 넣었다는 말은 아니다. 반대로 이들 대부분은 정말 하고 싶어서, 좋아서 넣은 것이다. <반도>의 가장 큰 목적은 한국 사회 문화, 보다 정확히 말하면 남자 중심의 아재 문화를 조롱하는 것이다. 이는 연상호의 이전 애니메이션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단지 덜 불쾌할 뿐이다.

덜 불쾌함은 연상호의 전작과도 다르고, 일반적인 한국 암청색 알탕 영화와도 다르다. 일단 애니메이션 영화들과는 달리 위악성을 극도로 강조하지 않는다. 암청색 알탕 영화와도 다른 점은, 한국남자들의 징글징글한 세계를 그리면서도 은근슬쩍 동조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의외로 영화는 놀리는 대상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다. 당연히 국뽕도 없고 가학적인 여성혐오도 없다. 영화는 <부산행>보다 더 요란한 신파를 과시하는데 (<시체들의 새벽>의 결말에서 가져온 듯한 후반부의 장면은 너무나도 정직하게 늘어지는 신파라 어리둥절해질 지경이다) 그럼에도 익숙한 질척거림은 느껴지지 않는다. 의외로 이 익숙하지 않음에 분노하는 관객들도 있을 거 같다.

단지 깊이는 없다. <분노의 도로>가 걸출했던 것은 진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퓨리오사와 동료들에게 강한 개성과 존재감과 동기를 부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들, 특히 이정현 캐릭터와 이레, 이예원의 캐릭터의 가장 큰 개성과 가치는 그냥 한국남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이 이야기가 모성이라는 주제를 건드리면서 영화는 더욱 평범해진다. 여성 캐릭터의 사용방식은 분명 <부산행>보다 낫지만 연상호는 여전히 의욕만 있고 방향은 아직 모르고 있는 듯하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반도’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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