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굴’·‘사생활’, 재미·독창성·영리함 그 어느 것도 없는 사기극의 최후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지금 관객들이 조지 로이 힐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스팅>1970년대 관객들처럼 즐길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 영화의 반전을 보고 속았다!”라고 느끼는 관객들은 없을 것이다. <스팅>을 안 보았고 내용도 모르는 관객들이라고 해도 이 반전이 어떤 형식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수많은 장르 영화들이 <스팅>의 형식을 차용했기 때문이다. 사기꾼 주인공이 있다. 더 나쁜 악당이 있다. 사기꾼이 곤경에 빠진다. 알고 봤더니 그게 더 나쁜 악당을 등쳐먹으려는 사기꾼의 계획이다.

<스팅>이 이런 종류 하이스트 영화의 시초도 아니고 이 형식을 개발한 것도 아니지만 사람들은 <스팅>을 참고했다. 그 결과 <스팅>은 세상에서 가장 반전이 안 놀라운 영화가 됐다. 그래도 괜찮다. 여전히 잘 만든 영화이고 재미있으며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의 스타 파워가 영화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에. 내용이 폭로가 된 뒤에도 재미있는 영화가 되려면 반전 말고도 다른 장점을 갖고 있어야 한다.

얼마 전에 개봉한 <도굴>을 보면 이 영화가 도대체 관객들에게 무얼 팔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영화는 거의 모범적으로 <스팅> 공식을 따른다. 이제훈이 연기하는 주인공은 복수자이고 이는 프롤로그만 봐도 알 수 있다. 송영창은 악당이고 불법적으로 사들인 골동품이 가득한 지하 수장고를 갖고 있다. 이제훈은 선릉에 있는 전설의 보검을 훔치려 한다고 한다.

하지만 초반 30분 안에 나오는 정보만 모아도 영화가 어디를 지나 어디로 가는지 보인다. <스팅>을 보지 않아도 된다. 지금 한 번 영화의 내용을 상상해보고 실제 영화의 내용과 비교해보다. 90% 이상이 내용을 맞힐 것이다. 여기서 확신이 서지 않은 부분은 단 하나, 송영창의 오른팔로 나오는 신혜선 캐릭터이다. 이 인물은 어디로건 쓰일 수 있어서 예측이 갈린다. 영화의 이야기가 새로운 맛을 더해줄 수 있는 기회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기회를 살릴 생각이 없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이 <스팅> 반전을 관객들이 눈치채지 못할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들이 관객들에게 제공하려고 했던 건 처음부터 긴장감 없는 사이다였을지도 모른다. 이미 여러 번 본 영화를 다시 보는 것처럼 진부한 새 영화를 보면서 후반의 사이다만을 즐기려는 관객들은 <도굴>도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사기꾼들이 지능대결을 하는 영화에서 지능대결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멀쩡하게 캐스팅된 배우들이 최근 몇 년 동안 나왔던 사기꾼 영화에 골백번 우려먹었던 캐릭터들을 그대로 연기하고 있다면 그건 배우 낭비가 아닐까? 특히 이제훈이 매력적인 양아치 남주를 연기하기 위해 동원하는 모든 연기 어휘를 보라. 우린 이런 것들을 이전에도 수도 없이 보았고 새로운 건 정말 하나도 없다. 재미, 독창성, 영리함을 모두 버려도 될 만큼 후반의 사이다가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그게 과연 사이다이긴 할까.

<도굴>과는 달리 <스팅>의 공식에서 완전히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작품이 하나 있다. JTBC 드라마 <사생활>이다. 여기서 서현이 연기하는 주인공은 <스팅> 공식을 따르는 완벽한 사기꾼이 아니다. 재능은 있지만 경력이 짧아 늘 실수투성이이고 전체 그림을 그리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 서현 주변의 다른 사기꾼들도 전체 그림을 다 보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예측불허의 상황 속에서 모두가 속고 속이는 복잡한 이야기의 재미, 그 와중에 성장하는 주인공 모두를 제공해줄 수 있는 기회다.

유감스럽게도 이 드라마 역시 그 기회를 잡지 못한다. 가장 큰 실수는 서술방식이다. 기본 형식 자체는 잘못이 없다. 제한된 정보만 갖고 있는 네 사기꾼이 번갈아가며 자기 관점으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이게 먹히려면 네 주인공이 공평하게 재미있고 이들이 공평한 위치에 있고 결정적으로 그들의 액션이 현재진행형이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신선한 드라마적 재미가 있는 건 당연한 주인공인 서현의 캐릭터와 네메시스였다가 협조자로 나오는 김효진 캐릭터뿐이다. 고경표와 김영민은 흔한 기업 음모물의 캐릭터이며 흔한 이야기밖에 갖고 있지 않다. 더 나쁜 건 이들의 이야기가 모두 사연이며 과거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추리와 역경을 거쳐 알아냈다면 재미있었을 정보들이 지루한 회상의 연속으로 제시된다. 여기엔 어떤 드라마적 재미도 없으며 무엇보다 제자리걸음이다.

그 결과 겨우 4회밖에 남지 않은 지금 이야기는 간신히 발동이 걸린 상태다. 게다가 이 작품이 과연 지능대결을 제공할 의지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드라마의 각본은 사기꾼 이야기치고는 지나치게 사이다 폭력을 좋아한다. 위기에 빠진 내 여자를 지키기 위한 정의의 주먹, 나를 깔보는 놈들을 향한 분노의 발길질이 지나치게 많다. 억울함은 한민족의 얼이니 (다른 말로는 한이라고 한다) 뭐랄 수 없지만 사기꾼 여자주인공을 내세운 드라마가 이렇게 쉬운 폭력에 만족한다면 이 드라마가 과연 맞는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는지 의심이 갈 수밖에 없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도굴’스틸컷,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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