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 소품인가... 고꾸라진 ‘태종 이방원’ 제 발목 잡았다
‘태종 이방원’, 말 사망 사건이 끄집어낸 끔찍한 촬영현장의 문제

[엔터미디어=정덕현의 이슈공감] 과연 말 못하는 동물이라고 촬영을 위해 소품처럼 마구 다뤄도 될까. KBS1 대하사극 <태종 이방원>은 말이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단 몇 초의 장면으로 인해 폐지청원까지 몰아치자 이번 주 결방을 결정하는 등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단 몇 초라곤 하지만, 그 장면은 방송으로 보여질 때부터 너무 끔찍한 충격을 줬던 게 사실이다. <태종 이방원> 7회에 등장한 문제의 장면은 이성계(김영철)가 사냥 도중 낙마사고를 당하는 장면이었다. 이 사고로 이성계가 누워 있는 틈을 타 정몽주(최종환)가 이성계의 일파를 몰아내게 되고 그건 다시 이성계 일파의 반격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된다.

즉 이 사고 장면이 당대 역사를 뒤집는 중요한 사건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굳이 이렇게 보기 불편할 정도로 말이 고꾸라지는 장면을 연출하게 된 데는 그 장면이 갖는 중요성이 한 이유가 됐을 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발에 와이어를 묶어 말이 달리다 그대로 고꾸라지게 해서 그 장면을 찍는다는 건 너무 끔찍하다. 그건 말 위에 탄 액션배우에게도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말은 자칫 큰 부상을 입거나 심지어 죽을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방송 후 시청자게시판에 이 장면에 대한 지적이 올라왔고, 동물자유연대 등에서 동물학대 논란이 제기된 후 사안은 일파만파 커졌다. KBS 측은 결국 사과문을 올렸는데 거기에는 모두가 우려했던 충격적인 사실이 담겼다. 그 말이 일주일 쯤 뒤에 결국 죽었다는 거였다. KBS 측 사과문은 그 위험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걸 드러내고 있다. ‘낙마 장면 촬영은 매우 어렵다’는 진술이나 ‘혹시 발생할지 모를 사고에 대비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하지만 ‘혹시 발생할지 모를 사고’가 생명을 위협하고 나아가 사망케 이를 수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촬영을 강행한다는 건 상식적인 일일까. 너무 아찔한 장면이어서 시청자들은 그것이 당연히 CG가 들어간 것이라 여길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들어 영상 촬영에 있어서의 ‘동물복지 가이드라인’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물이 촬영에 들어가는 많은 드라마들은 대부분 ‘동물복지 가이드라인’에 따라 촬영했다는 고지를 담고, 위험한 장면은 CG나 더미 사용으로 촬영하는 추세다.

그런데 왜 이런 변화에도 <태종 이방원>은 말이 죽을 정도의 무리한 촬영을 강행했을까. 그건 두 가지 이유가 겹쳐졌을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제작비를 아끼기 위함이다. 실제로 말을 쓰면 시간당 대여비만 주면 된다고 한다. 심지어 불의의 사고가 나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계약조건을 달기도 한다고 한다. 이러니 한 생명을 ‘값싼 소품’ 취급하며 쓰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관행처럼 되어 있는 혹독한 사극 촬영에 대한 불감증이다. 한 매체 보도에 의하면 <태종 이방원>을 연출한 김형일 PD는 과거 <정도전> 촬영에서도 말이 고꾸라지는 장면을 똑같이 연출한 바 있다고 한다. 당시에 그 장면은 말의 발에 묶인 와이어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물론 다른 방법으로 촬영하는 사극도 적지 않지만 여전히 과거의 사극 촬영에 하나의 기법(?)처럼 관행이 되어버린 요소들이 존재하고 그것이 사건으로 불거지게 된 것.

동물보호 정책활동에 앞서고 있는 동물권행동 카라에 따르면 이 같은 장면은 90여 년 전인 1930년대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한 ‘폭력적인 촬영 방식’이라고 한다. 당시 <경기병 여단의 돌격 The Charge of the Light Brigade, 1936년>이라는 영화에서는 이런 촬영방식으로 무려 25마리가 죽었다는 것. 그 후 이런 촬영방식으로 동물들이 목숨을 잃는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미국인도주의협회’가 미디어의 동물 출연에 관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즉 90년 전 촬영방식을 지금도 쓰고 있는 우리네 사극의 씁쓸한 현실이다.

<태종 이방원>은 꽤 오래도록 이어지지 못했던 정통 사극의 부활이라는 공감대를 갖게 만든 드라마였다. 즉 최근 들어 역사 바깥의 상상력이 강조되는 사극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적어도 KBS 같은 공영방송이 정통 역사를 다루는 사극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기반해 제작된 작품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공감대가 사극 촬영 현장에서의 여전한 후진적 현실에 의해 제 발목을 잡히는 상황이 발생하게 됐다.

사극은 사실 출연 배우들조차 종종 쉽지 않은 촬영 현장의 혹독함을 토로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보면 말은 물론이고 이런 촬영을 위해 동원되는 액션배우들도 한 장면을 위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이번엔 말이든 배우든 촬영에 생명이 위협받는 환경에 들어가야 하는 현실은 최근 사회에서 중대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중대산업재해’ 문제와 이 사안이 다른 게 아니라는 걸 통감하게 된다.

KBS는 “이번 사고를 통해 낙마 촬영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확인했으며, 다시는 이 같은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다른 방식의 촬영과 표현 방법을 찾도록 하겠다”며 “또한 각종 촬영 현장에서 동물의 안전이 보장될 수 있는 방법을 관련 단체와 전문가들의 조언과 협조를 통해 찾도록 하겠다”고 사과문을 통해 밝혔다. 하지만 이런 사과문 하나로 생명이 소품처럼 취급되는 현실이 바뀔지 시청자들은 의구심을 느낄 수밖에 없을 듯하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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