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일강의 죽음’, 이런 포와로 탐정도 한 명쯤은 괜찮지 않을까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모든 훌륭한 소설이 훌륭한 영화로 각색되는 건 아니고, 모든 재미있는 소설이 재미있는 영화로 각색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전자는 비교적 쉽게 이해한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나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는 훌륭한 소설이지만, 문학적인 매력이 영화로 쉽게 옮겨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긴 한데, 그건 지금의 논점과는 상관없다.) 이를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모든 재미있는 소설이 재미있는 영화로 만들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이유는 의의로 전자와 같다. 많은 재미있는 베스트셀러 소설의 매력은 종종 ‘문학성’과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문학성이 있다’는 ‘작품성이 뛰어나다’와는 조금 다른 의미이다. 작가가 풀어가는 이야기가 문학이라는 매체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뜻이다. 정교한 미문을 쓰거나 섬세한 심리묘사를 하지 않더라도 이 카테고리 안에 속하는 작품들은 의외로 많다. 아이작 아시모프, 애거사 크리스티가 이에 속한다. 이들의 책은 끊임없는 대화의 연속이고 그 대화는 사건 수사이거나 과학적 이론에 대한 토론인데, 읽는 동안은 재미있지만 이걸 읽는 대신 영화나 드라마로 보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거사 크리스티는 각색물이 엄청나게 많은 작가이다. 일단 유명한 작가이고 책이 잘 팔렸으며 작품량도 많다. 이 세 조건이 갖추어지면 각색이 어렵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해진다. IMDb를 보면 크리스티 이름이 뜨는 작품이 173개인데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이다.

이들 중 훌륭한 작품이 있을까? 빌리 와일더의 <검찰측 증인>은 클래식 할리우드 시대의 고전으로 여겨진다. 다른 소설과는 달리 법정물이기 때문에 각색이 쉽고 멜로드라마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도 르네 클레르의 1945년 버전을 포함한 여러 편의 준수한 각색물을 낳았는데(그 중에는 소련 영화도 있다), 이 소설은 추리물이기도 하지만 미래 슬래셔 영화의 원형이라고 여겨질 만큼 호러와 스릴러의 비중이 커서 역시 다른 작품에 비해 영화화가 쉽다.

하지만 에르큘 포와로나 제인 마플이 나오는 정통추리물은 사정이 다르다. 앨버트 피니가 포와로로 나오는 시드니 루멧의 <오리엔트 특급살인>은 괜찮은 영화이고 잉그리드 버그먼에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주긴 했지만 아무래도 앞에 언급된 영화들에 비해 단조롭다는 생각이 든다. 그 결과 대부분 크리스티 각색물은 텔레비전으로 간다. 텔레비전 시청자들은 자기가 아는 이야기를 충실하게 따라가기만 해도 만족하기 때문에. 꼭 엄청나게 영화적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심지어 좋을 필요도 없다.

최근에 두 편의 크리스티 소설을 각색한 케네스 브래너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어려운 도전을 하고 있다. <오리엔트 특급살인>과 <나일 강의 죽음>은 모두 각색하기 까다로운 ‘대표작’이다. 특히 <오리엔트 특급살인>은 살인사건 이후 대부분을 차지하는 게 탐정과 용의자의 문답이다. 브래너는 이 단조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거의 서커스와 같은 곡예를 한다. 매 심문마다 무대를 바꾸고 폭력적인 액션을 넣는다. 그 때문에 따뜻한 걸 좋아하고 몸쓰기를 싫어하는 크리스티의 명탐정은 거의 액션 영화 주인공처럼 눈보라 속을 뛰어다니면서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 그 결과 지루하지 않은 영화가 만들어졌지만 대부분 크리스티 팬들은 “나의 포와로는 이렇지 않아!”를 외치게 된다.

<나일 강의 죽음>은 상대적으로 각색이 쉬운 소설이다. 일단 살인사건의 문을 여는 도입부의 멜로드라마가 강하니까. 하지만 첫 살인이 일어난 뒤부터 탐정과 용의자의 문답이란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크리스티는 이후에 두 개의 살인을 추가해 긴장감을 부여하지만 그렇다고 정통 퍼즐 미스터리의 형식이 깨지는 건 아니다.

브래너는 두 가지 해결책을 꺼낸다. 첫 번째는 멜로드라마를 늘리고 추리파트를 줄이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첫 번째 살인은 영화 중반에 일어나고 수사 과정은 최대한 압축된다. 그 결과 영화적으로는 덜 지루해졌지만 크리스티의 정수는 날아간다. 영화적인가, 아닌가를 떠나 크리스티의 작품에서 가장 재미있는 건 여전히 이 문답을 통한 수사과정과 이를 방해하는 교묘한 기만인 것이다.

두 번째 해결책은 브래너가 포와로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오리엔트 특급살인>에서 포와로는 원래 포와로의 캐리커처에 액션 영화의 기능성을 추가한 일차원적 캐릭터였다. 이번에 브래너는 조금 더 까다로운 시도를 한다. 이 천재 명탐정에 그 시대에 맞는 인간적인 깊이를 부여하는 것이다. 벨기에의 형사였던 이 명탐정은 이제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기억을 극복하지 못한 농부다. 우스꽝스러운 수염도 전쟁 때 입은 상처를 가리기 위해 기른 것이다. 제2, 제3의 살인사건이 일어나면서 포와로는 사건을 막지 못한 자신의 능력에 회의를 품고 종종 좌절한다.

여전히 팬들의 답변은 “나의 포와로는 이렇지 않아!”이다. 나 역시 그런데, 그래도 <나일 강의 죽음>의 시도엔 그럭저럭 수긍하게 된다. “여전히 나의 포와로는 이렇지 않지만, 케네스 브래너의 포와로는 저런가 보지”에서 멈추게 된 달까. 세상엔 온갖 방식으로 재해석된 수천 명의 홈즈가 있는데, 이런 포와로가 하나 정도 나온다고 그렇게 열심히 반발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이 영화가 불만인 사람들은 언제나 데이비드 슈세의 포와로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나일 강의 죽음’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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