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시벨’, 액션이 채워야할 자리를 악당의 한탄이 차지했을 때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한국 주류 영화에서 드러나는 특징 중 하나는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어린 시절에 텔레비전으로 보았던 옛날 할리우드 영화의 경험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들이 늘었다는 것이다. <타워>는 <타워링 인페르노>를 닮았고 <비상선언>은 <에어포트> 시리즈와 <카산드라 크로싱>을 닮았고 <모가디슈>는 <북경의 55일>을 닮았고… 창작자는 반박할 수 있겠지만 이런 경향이 10여년 넘게 이어지면 흐름이라고 볼 수밖에.

황인호 감독의 <데시벨>도 옛날에 봤던 할리우드 영화의 감흥을 재현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대충 세 편의 영화가 떠오른다. 테러 행위 자체는 <스피드>를 닮았다. 과거의 사연은 <크림슨 타이드>를 연상시킨다. 범인의 동기는 <더 록>과 비슷하다. 모두 감독이나 기타 관련자들이 1990년대에 극장에서 봤을 법한 영화들이다. 레퍼런스들이 조금 젊어졌다.

관객들은 <데시벨>하면 자연스럽게 잠수함을 떠올릴 텐데, 정말로 영화는 태평양에서 훈련 중인 잠수함에서 시작된다. 만든 사람들은 뿌듯했을 것 같다. CG로 재현한 잠수함 묘사는 드라이 포 웻(dry for wet) 기법으로 그린 1990년대 잠수함 영화보다 사실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할리우드 영화라도 1990년대 영화와 기술적으로 경쟁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지만.

하지만 진짜 액션이 시작되는 곳은 1년 뒤 부산이다. 테러리스트가 소리가 커지면 터지는 폭탄을 부산 곳곳에 심었다. 1년 전 잠수함 사고에서 살아남아 영웅이 된 주인공은 부산 시내를 돌아다니며 그 폭탄을 찾아야 한다.

설정 자체는 나쁘지 않다. <스피드>와 조금 닮긴 했지만 다른 점이 더 많으며, 이 다른 점에 집중하면 비슷한 결을 추구한다고 해도 완전히 다른 내용의 영화를 만들 수 있다. 수많은 이야기 가능성이 떠오른다. 소리에 반응하는 폭탄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소리 자체를 차단할 것인가, 아니면 먼저 터트려 희생자를 막을 것인가.

그런데 영화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아이디어가 없다. 주인공은 테러리스트의 명령을 생기 없이 따라할 뿐이며 상대편의 계획을 앞지를 수 있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주인공과 가족들이 끝까지 살아남은 건 테러리스트가 봐줬기 때문이고 테러리스트는 대단한 방해 없이 목표 대부분을 달성한다. 무엇보다 관객들은 그 순간 아무런 감흥이 없다. 영화 내내 이렇다면 긴장감이 사정없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유가 없지는 않다. <데시벨>에는 <스피드>식 액션을 펼칠 공간이 부족하다. 러닝타임의 절반 가까운 시간이 ‘1년 전 잠수함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할애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영화는 굉장히 중요한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게 이 영화의 핵심을 이룬다. 처음부터 끝까지 잠수함에서 이야기를 끌어갔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이야기를 채울만한 드라마가 없었을 것이고 지나치게 <크림슨 타이드>를 닮았을 것이며, 무엇보다 그 때의 판단과 갈등을 다시 곱씹을 미래 시제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답이 <스피드>식 스릴러인가?하고 묻는다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스피드>와 <다이 하드> 액션물에는 관객들의 긴 집중을 요구하는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크림슨 타이드>가 중간중간에 들어가면 긴장감이 떨어지고 집중력이 분산된다. 다른 서브 장르를 찾는 게 맞았을 것이다. 추리물이 더 그럴싸하지 않았을까.

남은 건 신파와 감상주의다. 액션과 서스펜스가 들어갈 자리에 악당의 자기연민과 한탄이 차지한다. 이런 이야기에 대해 강한 감정이 들어가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될 게 없지만 그 감정은 행동과 냉정한 사고로 연결되어야 한다. <데시벨>에서는 모든 게 정체된 채 멜로드라마적 감상주의 안에 젖어 있다. 가끔 눈에 들어오는 것은 뜬금없는 유머인데, 이는 <오싹한 연애>와 <몬스터>를 만든 황인호 감독의 개성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유머가 들어가는 것은 전혀 나쁜 일이 아닌데, 이게 이 질펀한 감상주의와 섞이면 합이 좋지 않다. 아무래도 더 나아질 수 있었던 재료들이 충무로식 기획 영화의 틀 안에 갇혀 뒤섞인 결과가 아닌가 싶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데시벨>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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