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섭’과 ‘유령’, 설 연휴 개봉한 두 국뽕 영화의 다른 결과물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올해 설날 시즌에 맞춰 개봉한 한국 영화는 두 편이다. 임순례 감독의 <교섭>과 이해영 감독의 <유령>이다. 둘 다 장단점이 있는 영화인데 개인적으로 나는 <유령>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교섭>에서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정보는 이 영화가 100억 이상의 제작비가 든 한국 영화 중 여성 감독이 맡은 최초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제야”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지만 그래도 역시 중요한 성취다. 단지 감독 선정이 이 영화의 완성도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는가. 거기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교섭>은 가장 무개성적인 임순례 영화다. 소재나 주제만 본다면 임순례의 전작들에서 아주 벗어나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제보자>와 같은 실화 소재 영화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성 위주 대규모 기획 영화라는 틀 안에서 감독의 개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 대부분이 날아가 버린다. 그리고 그 무개성적인 터치가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최선의 방법이었는지 의심이 간다.

샘물교회 이야기이다. 선교여행하러 아프가니스탄에 간 한국 개신교 신도들이 탈레반에게 납치당하고 정부에서는 인질범에게 몸값을 주고 이들 대부분을 데려온다. 이건 결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개신교의 호전적 전도, 그로 인한 외교적 갈등, 이 사건이 세계사에 끼친 영향이 거미줄처럼 엮여 있다. 하지만 영화는 ‘자국민에 대한 국가의 책임’으로 주제를 제한한다.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과연 그게 최선의 선택인가? 우린 탈레반에게 몸값을 지불했고 그 돈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의 압제에 어떻게든 영향을 끼쳤을 것이고 샘물교회는 여기에 대해 어떤 죄의식도 표출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들은 당연히 포함되어야 하지 않는가.

이 단순화된 세계에서 주인공은 두 명의 허구인물로 축소된다. 한명은 황정민이 연기하는 외교관으로 멜로드라마 틀에서 ‘우리’를 대변한다. 다른 하나는 현빈이 연기하는 국정원 직원으로, 외국인들 앞에서 기 죽지 않으려 데려오는 키 큰 남자 역이다(이런 캐스팅을 볼 때마다 한국 사람들의 컴플렉스가 노출되는 것 같아 무척 민망하다). 두 사람 모두 제대로 활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황정민은 모든 장면에서 감정과잉이고 캐릭터는 늘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어서 도대체 외교관처럼 보이지 않는다.

각본은 현빈을 어디다 써먹어야 하는지 끝까지 모르는 것 같다. 중간에 나오는 카체이스 액션 같은 건 깔끔하게 잘 찍었지만 굳이 있어야 할 장면은 아니다. 현빈을 액션 영화 주인공으로 캐스팅했으니 의무감에 넣은 것이다. 이 영화는 이를 포함한 온갖 종류의 무의미한 필러들로 그득하다. 이들을 빼고 보다 복잡하고 입체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설날 대작에서 그런 걸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남이 투자한 큰 돈을 굴리는 사람들이 이런 걱정을 하는 건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고 그 결과물이 좋다고 할 수는 없다.

<유령>은 <교섭>과 정반대의 영화다. 둘 다 국뽕을 내세운 설날 영화지만 공통점은 거기서 끝난다. 가장 큰 차이점을 뽑는다면 <교섭>이 크고 복잡한 주제를 극도로 단순화해 먹기 쉬운 (맛있다고는 말 못하겠다) 멜로드라마로 만들었다면 <유령>은 충분히 단순할 수 있었던 재료들을 갖고 하고 싶은 건 다 했다는 데에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유령>은 대자본이 들어간 오타쿠 영화다.

원작이 있다. 마이지아가 쓴 <풍성>이라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영화와 드라마로 각색되었고 영화판은 <바람의 소리>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수입되어 팬을 확보하고 있다. 몇몇 사람들은 테크닉적으로 개선된 <바람의 소리> 리메이크를 기대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 길로 안 간다.

원작은 추리물이다. 반일단체의 스파이일 수도 있는 용의자들이 호텔에 모인다. 탐정인 일본군 장교는 누가 스파이인지 밝혀내려 하고, 후반에야 정체가 드러나는 스파이는 장교 몰래 정보를 호텔에서 빼돌려야 한다. 이는 매력적인 설정이고 쉽게 다른 나라로 이식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독일군 점령 당시의 프랑스도 가능할 것이다. 밀고자인 레지스탕스 동료의 정체를 밝히는 여자가 주인공인 쥘리앵 뒤비비에의 <마리 옥토브르>가 생각나기도 한다.

<유령>의 초반부는 원작을 따라하는 것 같다. 하지만 관객들은 도입부에서 이하늬가 연기하는 주인공 박차경의 내면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유령의 정체를 밝힌다는 표면적인 동기는 의미를 잃는다. 초반부터 원작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원작 내용을 아는 사람들에겐 반전으로 보이는 국면 전환들이 있어서 추리물로서 기능을 완전히 잃은 건 아니지만.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중반에 발생하는데, 박소담이 연기하는 유리코의 특정 행동을 시작으로 영화는 사방에 총알과 피가 튀는 액션물이 된다.

짜임새가 아주 좋은 영화라고 보긴 어렵다. 가장 큰 이유는 그게 감독의 관심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거의 언제나 조금씩 과잉인 부분부분 안에서 재미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원작이 하다 만 것을 기어이 끝내고 만다는 점에서 좋은 리메이크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바람의 소리>의 관객들은 저우쉰과 리빙빙 캐릭터 사이에 흐르는 성적 긴장감에 주목했다. <유령>은 박차경을 그냥 동성애자로 만들고 주변 두 여자들과 엮는다. 논리적인 이유로, 미적인 이유로 다른 영화에서 주저할 법한 수많은 선택을 이 영화는 한다.

결과물만 본다면 <유령>이 <교섭>보다 더 재미있다. <교섭>은 설날 흥행 영화의 관습 다발이고 핵심이 되어야 할 고민의 깊이도 얕다. 하지만 <유령>은 이해영의 인장이 영화 전체에 박혀 있고 보고 있으면 감독의 고집스러운 취향과 미감, 욕망에 휩쓸려가는 기분이 든다. <교섭>은 쉽게 잊히겠지만 <유령>도 그럴까. 후자 쪽이 훨씬 매력적인 경험인 건 당연하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유령><교섭>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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