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울하고 비루한 청춘들이여

2012-04-30     신주진


- <패션왕>, 사각관계의 심리적 갈등을 즐겨라

[엔터미디어=신주진의 멜로홀릭] 2004년 <발리에서 생긴 일>(이하 <발리>)은 멜로드라마의 지형을 바꿔놓았다. 이 드라마가 선보인 파격적인 사각관계는 네 인물 각각을 중심으로 하는 삼각관계 네 개가 중첩된 팽팽한 사각형을 이루었었다. 상이한 계급으로 갈라진 이들 사이에서 사랑은 신분상승욕망이나 소유욕망과 분리되지 않았다. 재민(조인성)이나 영주(박예진)는 결코 자신들의 계급적 기반을 포기하지 못했고, 수정(하지원)과 인욱(소지섭)은 끝까지 신분상승의 욕망을 버리지 못했다.

그것은 ‘사랑이냐 돈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그래서 결국 돈 대신 사랑을 택하는 식의 신파극적 갈등이 아니었다. 사랑과 욕망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간극은 사라지고, 이에 따라 사랑의 절대성과 순정성도 파기되었다. 이들의 비극적 파국이 말해주듯 그것은 잔인하고 현실적인 자본주의적 사랑방정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발리>의 명성에 가려 거의 잊혀졌지만, 당시 두 남자 사이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인욱을 사랑했다 재민을 사랑하게 되는 이수정이라는 인물은 엄청난 지탄과 비난을 받았었다. 그녀는 드라마 시간 안에서 두 남자 모두를 사랑했고, 두 남자 모두와 섹스를 한 여주인공이었다.

<패션왕>은 <발리>의 연장이면서, 또한 달라진 현실의 청춘들을 보여준다. 현실은 더욱 잔인하고 치열해졌다. <발리>의 인물들은 사랑만 하기에도 바쁘고 벅찼지만, 이제 <패션왕>의 인물들은 사랑만 하고 있기엔 그 현실이 너무 고달프고 벅차다. <발리>의 인물들이 사랑자체에 몰두했던 반면, <패션왕>의 인물들은 사랑도 해야 하고 엄혹한 생존경쟁의 현실에서 살아남기도 해야 한다. 살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인물들은 동대문 공장 안에 있는 영걸(유아인)과 가영(신세경)만이 아니다. 재혁(이제훈)과 안나(권유리) 역시 여차하면 버림받고 내쳐질지 모르는 생존의 위기에 놓여있다.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영걸·가영과 재혁·안나는 서로의 세계를 염탐하고 시기하고 욕망한다. 두 진영을 갈라놓은 계급갈등은 쥐뿔도 없는 영걸과 가영이 천부적인 패션감각을 타고 났다는 사실로 인해 더욱 날카로운 대결로 나아간다. 이들을 사각관계로 몰고 간 것은 다름 아닌 영걸과 재혁의 바로 그 적대적인 라이벌 관계이다.

영걸은 재혁의 여자 안나를 유혹하고, 재혁은 영걸이 데리고 있는 가영을 넘본다. 동시에 재혁은 안나를 영걸에게 빼앗길 수 없고, 영걸은 가영을 재혁에게 넘겨줄 수 없다. 이들은 두 여자를 사이에 둔 이중의 연적관계에 놓인다. 가영을 둘러싼 연적관계이자 안나를 사이에 둔 연적관계. 이들은 둘 중 어느 하나도 놓을 수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어느 하나라도 놓는 순간 힘의 균형이 저쪽으로 넘어갈 것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가영과 안나 역시 영걸과 재혁 둘 다에 대해 이중의 연적관계에 빠져든다.

따라서 네 인물이 마치 제로섬 게임처럼 서로 완전히 맞물려 있는 이 사각관계에서 네 사람 모두가 두 여자,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고 흔들리는 것은 필연적이다. 재혁은 시들해진 연인 안나와 새롭게 나타난 가영 사이에서 갈등하고, 안나는 쉽게 차지할 수 없는 재혁과 무례하고 저돌적인 영걸 사이에서 흔들린다. 영걸은 가엾고 안쓰러운 가영과 도도하나 솔직대담한 안나 사이를 오가고, 가영은 무심하고 이기적인 영걸과 강해보이지만 더없이 여린 재혁 둘 다에게 휘둘린다.



이들 모두가 라이벌을 대척점에 두고 두 사람 사이에서 흔들리고 갈등하는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흔들리고 갈등하는 것은 사랑이냐 욕망이냐의 양자택일 사이에서가 아니라 사랑과 욕망이 한데 얽힌 복합적 감정들 속에서이다. 이들에게 사랑의 감정은 투명하지 않고 생존을 위한 무의식적 의지나 어떤 목적을 위한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접근과 결부되어 있다. 욕망이 사랑을 낳기도 하고, 질투와 시기, 분노가 사랑을 부추기기도 한다.

반대로 사랑은 이용되기도 하고 배반당하기도 하며, 그 사랑이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그들은 때로 자신의 마음을 배반하는 행동을 ·해야 하고, 자주 비열해져야 한다. 그리곤 죄의식과 연민, 회한과 고독을 맛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사랑을 이용하고 배반할수록 역설적으로 사랑은 더욱 커져간다. 영걸이 자신 때문에 몰매를 맞는 가영을 못본 척 뒤돌아서며 느끼는 열패감과 연민이 재혁에 대한 분노를 키우고 동시에 가영에 대한 사랑을 키우는 것처럼. 재혁이 고소로 가영을 옥죌수록 그녀에 대한 연민도 커지고 사랑도 커져가는 것처럼.

<패션왕>의 묘미는 바로 그러한 사각관계의 심리적 갈등과 긴장을 즐기는 것이다. 사랑과 욕망이 얽히고 질투와 배반이 뒤섞인 이들의 복잡하고 미묘한 심리, 그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감정의 파고를 즐기는 것이다. 특히 같은 업종에서 일하는 네 남녀의 치열한 생존기는 이들 사이의 계급갈등과 생존투쟁을 더욱 역동적으로 만들어주고, 그에 따른 사각관계의 심리적 갈등과 긴장도 더욱 고조시킨다.

물론 사랑의 짝짓기나 선긋기가 명확하지 않은 것이 주는 불편함이 존재한다. 선악으로 쉽게 구별되지 않는 인물들의 이중성이 동일시와 몰입을 방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사랑하는 두 남녀와 그들을 방해하는 서브캐릭터들이 만드는 기존 사각관계와는 다르다. 사랑은 엇갈리고 어긋난다. 이들 중 어떤 쌍도 제대로 합일과 일치를 이루지 못한다. 이들은 자신이 누구를 사랑하는 건지 누구를 욕망하는 건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이들은 그 누구도 온전히 지지받지 못하는 비루하고 서글픈 청춘들이다. 그래서 나는 이 우울하고 가련한 청춘들을 응원한다.


칼럼니스트 신주진 joojin913@entermedia.co.kr


[사진=SBS]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