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너리그 에이스의 비애
2012-06-21 김교석
- <무한걸스>, <일밤>의 저주에 빠질 것인가
[엔터미디어=김교석의 어쩌다 네가] 기회가 오면 잡아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무한걸스>는 누구보다 준비가 잘 된 2군 선수였다. 현재 상황을 비유하자면 마이너리그를 씹어 먹는 최고의 투수가 빅리그 팀으로부터 긴급호출을 받은 것이다. 문제는 있다. 그를 부른 팀은 20연패를 기록 중인 리그 꼴찌 팀이다. 당연히 거절할 수는 없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가 등판한 경기가 20연패 중인 팀이 간신히 1점차 이기고 있는 9회 말 무사 만루의 상황인 것이다. 그에게도 팀에게도 연착륙의 기회는 없다.
<무한걸스>는 훌륭한 프로그램이다. 여기엔 이견의 여지가 없다. 2007년 첫 방송을 한 자체제작 케이블 예능 프로그램이 아직까지 살아남은 것 자체가 <무한걸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증이며 <무한도전>의 스핀오프 프로그램이란 태생적 한계는 이 긴 세월 동안 이미 넘어섰다.
프로그램의 구성과 기획 측면에서 볼 때도 리얼 버라이어티가 갖춰야 할 캐릭터 쇼의 규칙을 정확하게 따르면서 비교적 자유로운 케이블의 수위를 센스 있게 활용하고 있다. 또한, 무엇보다 <무한걸스>를 높게 평가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개척한 역사에 있다. 여성은 홍일점이나 꽃병, 혹은 보조 정도로 활용하는 데 그치는 보수적인 예능 신에서, <무한걸스>는 여성 출연진만으로 이루어진 유일무이한 프로그램으로 역사를 만들어 내고 있는 중이다. 그것도 억지나 여성성이 아닌 웃음으로써.
물론 현영이 리더를 맡았던 시즌2의 흑역사를 기억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송은이를 비롯한 멤버 전원이 바뀌면서 정가은, 정시아 등을 배출한 시즌1과는 전혀 다른 프로그램이 됐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2010년 12월부터 다시 시작된 시즌3은 송은이를 필두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원년멤버들이 다시 뭉쳤고, 시즌2의 에이스 안영미와 송은이의 오랜 짝 김숙을 영입해 진용을 탄탄하게 꾸렸다.
이렇게 <무한걸스> 역사상 가장 검증된 멤버들로 공중파에 입성했다. 그런데 또 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리얼 버라이어티는 멤버들 간의 관계망 속에서 각자의 캐릭터가 잡히는 과정이 얼마나 재밌느냐에 따라 프로그램의 생명이 달라지는데 <무한걸스> 시즌3은 이미 80회 이상 방영되며 캐릭터 역할 생성과 배분이 끝난 뒤였다. 이에, 공중파 연착륙을 위해 선택한 것은 자신들의 모태인 <무한도전>에 대한 오마주였다. 하지만 뒤집어보면 비난을 피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와 함께 급한 김에 쉽게 가려는 안이한 태도가 엿보인다. 다급한 마음에 다짜고짜 가운데로 돌직구를 던져버린 것이다.
공중파 첫 방영 특집인 ‘무걸 출판사’는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무한걸스> 시즌3을 보지 못한 시청자들에게는 더 산만했을 것이다. ‘무걸 출판사’는 <무한도전>의 ‘무한상사’의 패러디이기도 하지만 시즌3의 멤버가 고정되고 캐릭터를 잡는 데 일조한 ‘무한토털패션’ 특집의 연결선 상에 있는 기획이다. ‘무한토털패션’은 ‘무한상사’처럼 사회생활 적응기라는 명분하에 <무한걸스> 내의 역할에 따라 나름의 직책을 정해서 큰 웃음을 주었던 특집으로 시즌3이 출범한 지 1년째인 2011년 12월에 방영되었다. 이때가 시즌3의 분기점이었다.
‘무한토털패션’은 마니또를 정해서 서로를 알아가는 ‘시크릿 MT’ 특집과 엮여서 방송됐다. 이때를 전후해 일명 ‘니나내나’ 콤비인 김신영과 신봉선 원투펀치와 나머지가 대립하거나 이 둘의 활약 위주로 웃기던 <무한걸스>의 관계도는 다시 재정리되었고, 김신영과 신봉선 이외의 멤버들의 역할도 더욱 부각되었다. 그 후 몇 달 뒤 다시 ‘무한토털패션 야유회’ 특집은 또 다시 큰 웃음을 줬다.
이 역사를 모르고서 지난주 MBC에서 방영된 <무한걸스>를 봤다면 처음 15분간은 웃을 수 있지만 한 시간 내내 익숙하지 않은 캐릭터들이 벌이는 상황극에 몰입하기 힘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케이블 <무한걸스>의 전매특허이자 하이라이트였던 망가뜨리기가 빠졌으니 나름의 기승전결의 흐름 또한 찾아볼 수 없었다.
다시 말해, MBC에서 방송된 <무한걸스>는 더 많은 시청자들을 맞이할 계획이 부족했던 것 같다. 기본적인 역량은 갖추고 있었지만 기회가 너무 급하게 찾아왔고, 그 질이 좋지 못했다. 케이블에서 공중파로 프로그램 전체가 입성한 케이스가 거의 없었기에 여러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다곤 하지만 충분히 공중파에서도 통할 프로그램을 그저 <무한도전> 따라하기 전략으로 풀어낸 것이 더욱 아쉽다.
실제로, 신봉선과 김신영은 공중파 예능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지만 그들의 진가는 <무한걸스>에서 제대로 나타난다. 밥집 아줌마나 세신사로 능수능란하게 분하는 김신영과 언제나 상황극을 만들고 받아주는 신봉선의 원투펀치를 능가하는 콤비플레이는 현재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전체를 놓고 찾아봐도 꼽기 힘들다. 게다가 이 둘과는 별도로 상황극 메이킹이 가능한 안영미와 연기가 되는 김숙까지 가세했다. 거기다가 엉뚱한 백보람과 실제로 도파민이 과도 분비된다는 황보가 스펀지처럼 웃음을 쭉쭉 빨아들이고, 송은이는 이 모든 것을 조율한다.
그런데 급작스런 승격에 몸을 사린 듯 <무도> 패러디로 방향을 잡으면서 이 모든 장점이 잘 드러나지 못했다. ‘무한토털패션’이 웃길 수 있었던 맥락이 ‘무걸 출판사’에서는 당연히 없었다. 그런데 앞으로 계속 <무한도전> 패러디를 이어나간다면 자신들이 겨우 겨우 만들어낸 특이성을 지워버리게 되는 것이다. 유일무이한 여성 프로그램이 공중파에 편성된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무한도전>의 뒤에 숨어버린다면 이들 또한 <일밤>의 저주를 피해가기 어려워 보인다. 단 한 편만 봤을 뿐이지만 6년 만에 <무한걸스>에게 찾아온 커다란 기회가 독이든 성배가 되지 않을까 염려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칼럼니스트 김교석 mcwivern@naver.com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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