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훈, 과거 들먹일 필요없는 까닭
2012-08-16 정덕현
- ‘두 얼굴’ 주지훈, <나는 왕>이 맞춤인 이유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주지훈은 두 얼굴을 가진 배우다. 그 얼굴에는 차가움과 따뜻함이 공존하고, 위악스러울 정도의 광기와 달관한 듯한 평온함이 함께 깃들어 있다. 그런 점에서 <궁>에서 보여준 차갑지만 정이 많은 황태자라는 캐릭터는 주지훈이 가진 양면의 매력을 처음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준 작품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마왕>에 이르러 이 양면성은 서로를 강화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변호사로서 마치 데드마스크를 쓴 것처럼 무표정한 냉철함을 보여주면서 아주 가끔씩 입 꼬리를 올리거나 눈빛의 변화를 주는 것만으로 그 가면 이면에 숨겨진 아픔과 고통과 분노를 표현해냈다. 한편으로는 악마적인 섬뜩함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인간미 가득한 얼굴을 숨기는 그 모습은 실로 마왕이라는 제목에 걸 맞는 것이었다. 그저 황태자 꽃미남의 이미지에 머물 것 같던 주지훈은 이로써 배우 주지훈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배우 주지훈은 20대 후반 마약을 투약한 혐의로 성장통을 겪었다. 사실 당시 그는 테스트에서 음성 판정을 받았다.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혐의를 인정하고 법의 심판을 받았다. 여기에 대해 주지훈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한 번 거짓말하면 계속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요. 무엇보다 제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았거든요. 당연히 벌을 받아야하고 반성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그 이후에 좀 더 스스로에게, 혹은 대중에게 당당할 수 있으니까요."
주지훈이 20대 후반에 겪은 이 일을 ‘성장통’이라 표현한 것은 그것이 배우로서의 주지훈을 세우는데 오히려 득으로서 작용했기 때문이다. 많은 꽃미남 스타들이 정상에 서게 되면서부터 배우라는 본분을 잊는 경우가 많다.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준 특정 캐릭터의 이미지를 고수하기도 하고, 그렇게 반복적으로 같은 이미지를 소비하면서 그 캐릭터 이미지가 자칫 배우의 이미지로 고정되어 버리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결국 배우란 다양한 색깔의 옷을 입을수록 빛나는 존재들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주지훈은 정상에서 다시 맨 바닥으로 내려옴으로써 배우라는 자신의 본분을 더 공고하게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배우로서 “그 나이에 인생을 돌아볼 기회”를 가진 그 시간이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고 술회했다.
아마도 그의 복귀작인 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그 성장통이 만들어낸 배우 주지훈의 면모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작품일 것이다. 전술한대로 그는 역시 양면성의 매력을 가진 배우가 분명하다. 이 영화에서 주지훈이 왕과 노비의 서로 다른 면모를 1인2역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왕이 되기 싫어 월담을 강행한 세자 충녕(세종)과 그와 똑같이 닮아 엉겁결에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노비 덕칠의 기막힌 운명을 다룬 영화다. <왕자와 거지>의 조선시대판이라고 해야 할까.
1인2역이기 때문에 영화는 거의 주지훈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총 131신에서 주지훈이 120신을 소화했을 정도니 영화 전체의 80%가 그의 분량인 셈이다. 그런데 이 충녕과 덕칠의 심리적인 변화가 그려내는 연기의 쌍곡선이 흥미롭다. 이것을 그래프로 표현하면 충녕이 꼭대기에서 밑으로 내려오는 반면 덕칠은 밑에서 꼭대기로 올라가는 형국이다. 그리고 그래프의 중간지점에 이르면 충녕과 덕칠이 마주치게 되는 지점도 생긴다.
두 명의 캐릭터를 동시에 연기해야 하는 주지훈으로서는 이 인물의 변화 과정을 각각 표현해낸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터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두 인물을 잘 소화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간 보여주었듯이 그에게 내재되어 있는 양면성의 매력이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주지훈이 보여주는 이미지 역시 지금까지와는 다른 반전을 보여준다. <마왕>이나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에서 보여준 어딘지 우울하고 무거운 분위기는 이 영화에서는 발견하기가 어렵다. 이것이 같은 배우가 한 것일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주지훈은 한없이 망가진다. 코미디라는 장르 자체가 어쩌면 그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코미디 연기 역시 상황이 우스울 뿐, 정극 못지않은 진지함 속에서 연기되어야 공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즉 어떤 점에서 보면 그는 늘 작품 앞에서 진지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가볍디 가벼운 이미지를 보여준 그는 그러나 앞으로 방영될 SBS 주말극 <다섯손가락>에서는 또 다른 이미지를 연기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 드라마는 비극적인 과거를 가진 젊은 청춘들이 자신에게 닥친 불행과 상처를 극복하고 다시 꿈과 사랑을 찾아가는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비운의 가정사를 가진 피아니스트를 연기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주지훈 하면 떠올리던 그 다크한 이미지를 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그가 연기한 일련의 캐릭터들을 놓고 보면 짧다면 짧을 수도 있는 연기 인생에서 그는 꽤 많은 변신을 보여주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의 내면이 아니라 복합적인 내면 연기를 주로 많이 보여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것은 주지훈이 여타의 한류스타나 꽃미남 스타와는 다른 행보를 걷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모든 연기자들처럼 그도 작품을 선택할 때 캐릭터에 대한 공감을 최우선으로 꼽아 왔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그는 시나리오만큼 연출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고 한다. 시나리오 상으로는 어딘지 부족하게 느껴져도, 좋은 감독을 만나면 전혀 다른 느낌으로 그려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것은 연기자로서도 또 인간적으로도 주지훈이 한 단계 성숙하고 있다는 징표다.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는 것이니 말이다.
20대의 좌충우돌을 넘어서 30대로 접어든 그는 확실히 꽃미남의 고정적인 이미지에서 탈피해 연기자로서의 다면적인 얼굴을 갖기 시작했다. 두 얼굴의 매력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얼굴의 매력으로 분화되어갈 지 기대되는 대목이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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