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진화한다…다음 무대는 메트 오페라다”

2012-10-15     정다훈


- 진짜 카르멘에게 오페라 코치 받는 베이스 바리톤 정일헌 [인터뷰]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돌직구 인터뷰] “제 마음을 ‘훅’ 가져가버린 여인이 와이프인데, 그녀와 만나면서부터 제 감성이 풍부해진 것 같아요. 와이프가(연극배우 이승비)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카르멘’과 닮았어요. 카르멘과 에스카미오의 운명적 만남이죠. 그전엔 슬픈 영화를 보면서 눈물 흘릴 수 있는 감수성이 부족했다면 이젠 보다 풍성해졌어요. 그러자 보다 쫀쫀해진 소리, 기름진 소리가 흘러나오더군요. 클래식 음악을 하다보면 아무래도 보수적인 면이 생기기 마련인데 제 안의 숨겨진 감수성을 터트려주는 코치가 생긴 겁니다.”

베이스 바리톤 정일헌은 “진짜 카르멘의 감성과 통찰력을 지닌 와이프에게 오페라 액팅 코치를 받아 매 공연에서 즐거운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립오페라단이 창단 50주년 기념 작품으로 오는 18~21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할 비제 오페라 <카르멘>의 ‘에스카미오’ 역으로 캐스팅 된 베이스 바리톤 정일헌 씨를 만났다. 정일헌은 바리톤 강형규와 더블캐스팅 돼 집시 카르멘의 마음을 뒤 흔들어 돈 호세와의 사랑을 비극으로 이끌고 가는 투우사로 변신할 예정.

■ 임팩트 있는 섹시한 ‘에스카미요’

비제의 <카르멘>은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카르멘」을 원작으로 작곡된 전 3막 2장의 오페라로 19세기 세비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집시 카르멘의 자유연애사를 다룬다. 카르멘(케이트 올드리치•김선정), 돈 호세(장 피에르 퓌흐랑•정호윤), 에스카미오. 미카엘라(박현주•최주희) 네 남녀의 엇갈린 사랑의 비극은 시종일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는 속도감 가득한 폴 에밀 푸흐니 연출로 인해 매혹의 오페라로 재탄생한다.

이번 무대는 정일헌의 국내 첫 데뷔작으로 “기대감과 기분 좋은 긴장감이 함께 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성악가라 ‘궁금하다’ 하는 만큼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게다가 제가 맡은 에스카미오는 유명한 ‘투우사의 노래’로 첫 아리아를 부르는 거잖아요. 긴장감이 없을 수가 없죠. 또 4회 공연 예정이었던 <카르멘>이 인기에 힘입어 1회차가 추가되면서 총 5회 공연을 올리게 됐는데 그 중 3회를 하게 됐어요. 금(19), 토(20), 일(21) 연속으로 3회를 하게 되서 컨디션 조절도 잘 하려고 합니다.”

극중 ‘에스카미오’란 인물은 돈 호세로부터 카르멘을 빼앗아 오기까지 하는 마초적인 남성으로 돈 호세의 부족한 남성미를 보완해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사실적 스토리텔링을 지닌 인물이기보다는 19세기 스페인의 시대상과 배경을 다 보여주는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인물이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는 분석력을 요구하는 인물이란 뜻이다.

“에스카미오가 카르멘의 사랑을 쟁취했는가 안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죠. 가수들이 앞만 보며 소리만 들려주고 보여주는 것만이 아닌 연극성을 지향하고자 해요. 연출님 역시 무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길 원하세요. 예를 들면, ‘투우사의 노래’를 부를 땐 걸음걸이 하나 하나가 중요한 거죠. 한 동작 한 동작이 그냥 걷는 게 아니에요. 투우사처럼 보이기 위해 디테일한 부분을 살려내야죠.

제가 에스카미오로 무대 위에 있는 시간은 고작 15분 내지 20분일거에요. 짧은 시간동안 관객을 몰입시킬 수 있어야 하는 거죠. 임팩트 있는 에스카미오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중이에요. 부드러운 섹시함 이라고 하죠. 단순히 멋있는 투우사라기 보단 안 보이는 듯 보여지는 그런 처연함이 있는 에스카미오를 표현하고 싶어요. 3막 돈 호세와의 대결씬에선 소리를 어떻게 하면 크게 낼까를 고려하기 보다는 실제 칼 싸움 장면과 스토리 흐름의 조화로움을 살아나게 하고 싶어요"



■ “오페라 가수이기 전에 오페라 배우이다.”

성악가의 크고 멋진 소리를 듣고 관객이 감탄을 하긴 쉽다. 하지만 단순히 잘 빠지고 큰 소리가 감동으로 이어진다고 단언하긴 어렵다. 소리 안에 진심이 담겨있지 않은지는 그 누구보다 관객들이 귀신같이 알아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악가들은 소리에 대한 고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씨는 “국내 오페라 무대가 소리경쟁의 장이 된 느낌이 있다”며 “그런 틀을 깨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일부 성악가들이든 관객이든 소리가 얼마나 크고 잘 빠지는지를 중요시해요. ‘그 가수 소리 안 들리던데’ 란 말 한마디면 끝나잖아요. 그런데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설사 극 전개상 가수가 뒤돌아서 노래를 한다고 해도 진정성이 느껴졌다면 그게 바로 아름다운 소리라고 보거든요. 오페라하우스 4층까지 잘 들리는 시원한 소리만 중요한 게 아닌거죠.”

그러면서 그는 성악에 있어 소리 자체가 목적이 아님을 강조했다. 소리는 음악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 종합예술인 오페라는 소리에만 얽매일 것이 아니라 연기 및 앙상블의 조화가 중요함을 전했다.

“저는 가수이기 전에 배우입니다. 노래 안에 연기를 담아내는 셈이죠. 노래 따로 연기 따로 생각해 사실적인 게 배제 되는 게 싫어요. 무대 위에선 항상 살아있고 싶거든요. 그래서 눈빛과 손끝 하나, 걸음걸이 하나라도 섬세하게 표현하려고 하죠. 물론 상대 배우가 함께 움직여야 더 살아나는거죠. 그렇게 되면 오페라가 대중과 더 가까워지게 되지 않을까요.”

정 씨의 설명을 듣고 궁금증이 생겨 질문을 던졌다. 국내 오페라 공연을 보면 같은 프로덕션, 같은 역이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도 다르게 표현하는 가수들이 많은 이유가 뭔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액팅코치가 없는 경우 그런 일이 많이 생길 수 있어요. 연출은 큰 틀 안에서 동선을 잡아주지 디테일한 연기는 알려주지 않거든요. 간혹 이 장면에선 저렇게 팔을 움직이지 않았으면 좋겠을 때 누군가는 지적을 해 줘야 하거든요. 가수들이 흔히 본인이 편한 자세로만 노래하길 바라는데, 연기의 조율을 위해선 같이 맞물려서 돌아가야 하는 거잖아요. 장면 장면의 연기에 대한 크리틱(비평)도 연출자는 말하기가 쉽지 않아요. 이럴 때 필요한 게 액팅코치에요. 이런 과정을 거친다면 앙상블의 합, 작품의 질이 향상될 수 있다고 봐요. ”



■ 섹시함과 구슬픈 보이스가 응축된 베이스 바리톤 정일헌

성악가 정일헌은 중후한 베이스 가수의 장점과 남성적인 바리톤 가수의 장점을 동시에 지닌 베이스 바리톤이다. 저음의 남성적 목소리는 지닌 성악가들은 많다. 그렇다면 그가 지닌 보이스의 스페셜리티(Specialty)는 뭘까?

“‘가브리엘 폭스’ 뭰헨 국립음대 교수님이 제 소리를 한번 듣고는 ‘자기가 사랑하는 바로 그 목소리’라고 하면서 꼭 자신의 제자로 와 달라고 했어요. 그 선생님 밑에서 사랑을 받으면서 공부했어요. 스승님이 제 소리가 ‘섹시 바리톤’이라고 소문을 내주실 정도였죠. 제 소리가 독일 할머니와 아줌마들이 좋아하는 소리였나봐요. 그런데 이번에 돈 호세로 출연하는 프랑스 테너 장 피에르 퓌흐랑도 ‘네 소리 너무 사랑해’라고 말하더군요(웃음).”

정씨의 아버님은 작곡을 하실 정도로 음악에 조예가 깊고, 어머님의 노래 실력도 뛰어나다고 했다. 다만 어머님이 기쁜 노래를 불러도 슬프게 들릴 정도로 다소 구슬픈 음색을 지녔는데, 어머님과 같이 정씨의 음성에도 구슬픈 정서가 흐른다. 정씨는 본인의 음색에 관련된 잊지 못할 일화도 전했다.

“제가 소속된 젬퍼오퍼 극장장이 인종차별이 심한 사람이에요. 특히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말도 못하게 심했거든요. 극장장이니 무대에 오르기 전 소속 가수들을 똑같이 격려해줄만도 한데, 동양인이란 이유로 저에겐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극장에서 각 나라별 음악을 주제로 VIP만 초대하는 특별 공연을 올린 적이 있었는데, 그날 처음으로 극장장에게 따뜻한 멘트를 들었어요. 제가 한국가곡 ‘청산에 살리라’를 불렀는데, 노래가 끝나고 극장장이 ‘네 노래 듣고 가슴에 뭔가가 왔다. 처음으로 감동받은 너무 아름다운 노래였다’는 말을 했어요. 제 보이스가 묘한 구슬픈 한(恨) 같은 게 있어 슬픈 노래랑 잘 어울렸나 봐요.”



■ “아직도 노래를 잘하진 못해요.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가고 있어요.”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정일헌(35)은 해병대를 제대하고 30세가 되던 해 독일 뮌헨 국립음대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스위스 카르멘 주역 선발 콩쿠르 1위로 에스카미요 역에 발탁된다. 2009년부터는 독일 드레스덴 국립극장((젬퍼오퍼)에서 주역으로 활동 중이다. 그의 프로필을 보면 충분히 자랑할 만도 한데 그는 절대 대단 한 게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말로 자랑하는 건 의미 없죠. 직접 봐서 좋은 게 진짜 잖아요. 항상 여기가 최고의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

정씨는 “태어나서 노래를 잘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며 “인정받으려고 노력하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는 다소 의외의 성악가가 된 계기를 밝혔다. 겸손과 도전 정신으로 무장된 차곡차곡 빈틈없이 쌓여진 시간이 지금의 베이스 바리톤 정일헌을 만든 것이다.

“음악을 좋아하고 노래를 잘하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정작 허스키 보이스에 음정도 제 멋대로 였을 정도로 노래를 못했어요. 이렇게 성악가가 될 줄은 몰랐죠. 막상 성악가가 돼서도 포기 하고 싶은 순간이 너무 많았어요. 그런데 언젠가는 잘 하겠지라는 오기가 생기더군요. 겸손한 척이 아니라 전 아직도 제가 노래를 잘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24시간을 노래 생각 뿐이라고 말하는 정일헌. “매일 노래 이야기 밖에 하지 않으니 와이프랑 아들 레오도 그 컨디션에 맞춰요. 제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했으면 어느 순간 분명 멈췄겠죠. 하지만 전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가고 있는 중이에요. 항상 욕심을 버리고 무대에 올라가려고 해요. 오히려 잘해야겠는 욕심만 앞세우면 몸 구멍 하나 하나에서 진정으로 터져나오는 소리가 아닌 좁은 소리만 나오거든요. 공연이 끝난 뒤 안 좋은 평이 나올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전 두렵진 않아요. 제 스스로 느끼기에 발전하고 있는가 아닌가가 중요하거든요.”

최근엔 그 누구보다 냉철한 관객으로 유명한 어머니에게서 성악 실력을 인정받은 사건도 일어났다. “‘제가 젬퍼오퍼에 갈 것이다’고 했을 당시 네 실력으로 어떻게 거기를 가냐고 코웃음을 치셨던 분이 어머니세요. 그런데 얼마 전 유학 갔다 온 뒤 교회 특송을 하게 됐어요. 오자마자 보여드릴 수도 있었는데 정말 때를 기다린거죠. 제 노래를 듣고 어머님이 처음으로 제 실력을 인정해주신 사건이죠. ‘이제는 너를 자랑할 수 있겠다’고 하셨거든요.”

하루 하루 진화해가는 정일헌 씨의 끝나지 않은 꿈은 뭘까. “<카르멘>의 에스카미오 역으로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서는 거에요. 테너라면 몰라도 베이스 바리톤이, 그것도 동양인이 메트 무대에 선다는 것. 거의 불가능한 꿈일수도 있겠죠. 하지만 전 소망하면 이뤄진다고 봐요. 제가 걸어온 길이 다 그랬거든요. 끝이 없는 거죠(웃음)”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국립오페라단]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