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찬 쏟아지는 에 딱 2% 부족한 것

2013-01-27     듀나


- <베를린> 한석규, 영어 잘 하려면 할수록..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박찬욱의 <스토커>가 선댄스에서 공개되어 여기저기에서 관련 뉴스들이 쏟아지는 중이다. 반응이 극과 극이라고 하던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리뷰어들도 영화 자체를 깎아내리는 건 아니어서 전체 반응은 썩 좋은 편이다.

그런데 <스토커> 관련 뉴스를 읽다보면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박찬욱을 그냥 찬욱이라고 부른다. '찬욱의 신작 영화는...', '찬욱은 이렇게 말한다...' 이들은 모두 박 대신 찬욱을 성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 때문에 내용만 보면 진지하고 지적인 글들이 한국 사람들에게는 구식 라디오 드라마 내레이션의 패러디처럼 읽힌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다른 나라의 이름들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낯선 문화 속에서 이름이란 우리가 확신할 수 없는 논리와 법칙과 순서를 따르기 마련이다. 많은 문화권에서 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익숙한 존칭은 의미를 잃는다. 물론 발음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영어권 리뷰어나 기자들이 Park Chan-Wook에서 앞에 나와 있고 짧은 Park을 이름으로 보고, 보다 묵직하고 하이픈까지 붙어있으며 뒤에 느긋하게 나오는 Chan-Wook을 성으로 보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란 말이다.

그래도 기왕 남의 이름을 부를 거였다면 사전 조사를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요샌 인터넷 검색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데. 더 좋은 방법은 부끄러워하지 말고 근처의 한국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적어도 그들 앞에는 두 사람의 한국인이 앉아있지 않은가. 박찬욱과 그의 통역 말이다. 그랬다면 그들의 글은 그냥 완벽했을 텐데.

전에 수없이 말했지만, <클라우드 아틀라스> 소설판과 영화판의 실수도 한국 문화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진행한 통에 나온 것들이다. 물론 그들도 조사를 했다. 하지만 상호작용이 없는 독학에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서울편에서 복제인간들의 유일한 식량은 비누라는 이름의 음료수이다. 영어 문장에서 이는 그렇게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한국어로 번역된 상태에서 비누는 낯설고 어색한 이름이다. 물론 한국어의 모양만 알고 일상생활 속에서 체화하지 못한 디자이너의 레터링은 어색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현장의 거의 유일한 한국인인 배두나에 몇 개 물었다지만 솔직히 현장의 배우가 간섭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데 이런 실수는 외국인들이 한국인들에게만 저지른 것은 아니다. 정반대의 일도 많이 일어난다.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외국어에 서툴지만 그래도 번역을 통해 서구문화에 대한 지식이 꽤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들은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지아 보다 영국이나 프랑스에 대해 더 많이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상한 실수들은 발생한다. 그 중 대부분은 깊은 생각을 거치지 안거나 그냥 한국식 문화나 편의성 속에서 대충 생각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얼마 전 <베를린>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영화의 시대배경은 현대의 베를린이다. 물론 이 베를린은 진짜 베를린이 아니라 한국의 영화광이 6,70년대 에스피오니지 영화들을 보면서 받은 인상들을 재료로 만든 위조품이다. 그런 위조품의 안에 지구상 유일한 냉전체제를 살고 있는 남북한 사람들을 쑤셔넣어 익숙한 장르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다. 고로 이 모방이 진짜 독일의 도시 베를린과 완전히 일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위조의 작업이란 진짜와 닮을수록 좋다. 결코 소홀히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편의성과 게으름 때문에 결과물을 계속 미완성으로 남겨놓는 것 같다.

내 신경을 가장 먼저 긁었던 건 한국인 캐릭터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퍼스트 네임만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프닝의 무기밀매 장면을 보자. 남한 첩보원, 북한 첩보원, 모사드, 러시아 무기 상인, 아랍 테러리스트들이 모여든다. 영화는 이들을 스파이 영화스럽게 소개하기 위해 자막으로 이름과 소속, 국적을 찍어내는데, 오로지 한국사람들만에게만 제대로된 이름을 주고 외국인의 경우 성을 제거해버린다. 하지만 러시아 사람 하나를 데려다놓고 그 사람 이름을 그냥 '유리'라고 부르는 건 그냥 웃기는 광경이다. 영화가 의도하는 공식적인 느낌을 제대로 살리려면 (부명까지 적을 필요도 없다) 그냥 성만 마저 붙여주면 된다. 그래야 완벽한 위조가 된다. 어차피 여기서 중요한 건 관객들이 그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공문서를 통해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니까.



자막만이라면 실수라고 이해를 하겠다. 하지만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대사 안에도 녹아있다. 영화 속 남한 스파이 정진수는 마티라는 CIA 요원과 친구다. 우리가 그의 성을 모르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정도로 친한 사이인가보지. 하지만 정진수가 나름 중요한 '구스타프'라는 남자에 대한 정보를 주는 장면은 괴상하다. 만약 마티가 스파이이고 그 정보가 중요하고 정진수가 그처럼 오래 유럽 생활을 했다면 구스타프라는 퍼스트 네임이 어떤 정보도 담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만약 몰랐다고 해도 마티는 당연히 물었을 것이다. '구스타프 누구?' 어차피 관객들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하나도 안 중요하다. 중요한 건 대사와 드라마를 설득력 있게 풀어가는 것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풀 네임을 불러야지. 아니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구스타프'를 빼거나.

영어 대사를 통해 전달되고 있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까다로워진다. 이 영화의 베를린이 진짜 도시가 아닌 것처럼 이 영화의 영어나 독일어 대사로 진짜 영어나 독일어가 아니라 위조된 한국어이기 때문에 번역을 통한 위조의 작업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그게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물론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영어 연기이다. 영어 대사가 들어간 한국 영화가 소개될 때 사람들은 대부분 세 가지 반응을 보인다. 우선 외국인 배우들이 연기를 못한다. 그 외국 배우들의 캐릭터는 꼭 영어 하는 한국 사람들 같다. 한국 배우들이 영어 연기를 못 한다. 셋 다 감독이 언어와 문화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들이다.



<베를린>에서도 그런 장면들이 있다. 대부분 한석규가 영어 대사를 하는 장면들이다. 한석규는 정진수의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지나치게 영어를 잘 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드러날수록 결과물은 나빠진다. 한석규와 마티 역의 배우가 함께 있는 장면은 두 배우가 같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심지어 다른 영화들을 하나로 편집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보면 손발이 오그라든다. 배우들의 영어 실력을 갑작스럽게 높일 수 없다면 해결책은 지나치게 영어를 잘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수백번 했던 소리지만 다시 한 번 말해보자. 영어를 잘하는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영어를 하는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묘사하는 것이다. 한석규에게 영어를 완벽하게 가르칠 수 없다면 정진수를 딱 그 정도 영어밖에 못하는 캐릭터로 만들고 주변 사람들도 그를 그렇게 본다는 설정을 만들면 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영어 연기는 보다 큰 문제의 일부에 불과하다. 이 영화의 외국어 대사들은 모두 한국어의 번역이다. 문제는 오로지 번역만으로 끝나버렸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주변에 녹아들 수 있는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 결과 이 영화의 배우들은 가상의 영어대사를 한국어로 번역한 번역체 문장을 다시 영어로 옮긴 것과 같은 대사를 읊게 된다. 그 때문에 대사의 무게가 엉뚱한 방향으로 옮겨지거나 오히려 대사가 자막의 번역처럼 보이는 부분들이 나온다. 류승범이 "Revenge is best served cold"와 같은 대사를 읊는 장면 같은 것들을 볼까? 이 표현은 정말로 (사전적 의미 그대로) 클리셰이기 때문에 그렇게 힘을 주면 어색할 뿐이다. 더 나은 (번역) 대사를 찾거나 무게를 떨어뜨리는 게 낫다.

물론 <베를린>에서 영어나 독일어 대사는 액션과 드라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하지만 과연 영화를 만들 때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있을까? 위에 지적한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그렇게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잘 할 수 있는 사람들을 기용해 그 한도 내에서 완벽하게 일을 시키면 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감독은 자기가 잘 하는 것을 열심히 하면 되는 거고. 멀쩡하게 자기 일을 다 해놓고 마감 때문에 영화의 무게가 떨어지거나 공들여 만든 세계의 설득력이 떨어지면 손해보는 건 도대체 누구인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작품 속에서도 언급되는 북한 위폐전문가들을 본받는 게 어떨까? 80퍼센트, 90퍼센트의 위조는 의미가 없다. 도달할 수 없다고 해도 위조의 목표는 일단 100퍼센트여야 한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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