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비극을 절묘하게 넘나드는 괴작

2013-03-16     조민준


- <돈의 화신>, 그 어떤 드라마보다 흥미로운 이유

[엔터미디어=조민준의 드라마 스코프] 드라마 <돈의 화신> 9회의 한 장면. 가석방을 받고 고아원에 일자리를 얻은 박기순(박순천)은 원장실을 청소하던 중 우연히 벽에 붙은 사진으로 눈을 돌린다. 그리고 거기서 마침내 잃어버린 아들의 모습을 발견하는데… 이 드라마틱하고도 비장한 장면에서 카메라는 돌연 뒤로 빠지더니 ‘도간희’라 새겨져 있는 원장의 명패를 보여준다. 이 특이한 이름이 무엇의 패러디인지 깨닫는 데는 수초도 걸리지 않을 터. 근데 아니, 이런 장면에서까지 웬 장난을?

전에도 얘기한 적 있지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코미디로만 이루어진 우리나라의 작품을 간절히 보고 싶은 사람 중 하나다. 영화건 드라마건. 헌데 전반부에는 웃기고 후반부에는 울리는 식의 전개가 어느덧 흥행공식으로 자리 잡은 데다 심지어 예능프로그램에서조차 감동이 중요한 키워드가 돼버렸으니 이 소원은 아마도 오래도록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이 드라마 <돈의 화신>의 경우도 조울증의 레벨로만 보자면 가히 독보적이다. 기본적으로 묵직한 비극으로 출발한 이 드라마는 수시로 시트콤 수준의 서사를 넘나들다가 심지어 위의 예시처럼 하나의 시추에이션에서 공존하기도 한다. 헌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감정의 극단을 오가는 데도 드라마의 리듬은 이상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점이다.

이 어리둥절함의 정체는 구성의 묘에 있었다. 그 첫 번째는 캐릭터 운용과 관련된 것으로, 지금까지 조증과 울증을 오간 드라마들의 실패사례들을 보면 한 캐릭터의 감정이 기능적으로 활용된 경우가 많았다. 이를테면 바로 직전까지 비통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짓던 주인공이 다음 장면에서 그새 희희낙락하고 있다든지. 사건에 인물을 끼워 맞출 때 발생하는 흔한 오류인데, 이렇게 되면 캐릭터가 얄팍해짐은 물론 정체성마저 흔들릴 수 있다.



그에 반해 <돈의 화신>에서는 인물들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해 놓고 출발했다. 그러니까 아직 이강석/이차돈(박지빈/강지환)이 어렸던 시절,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인물들은 거의가 비극 캐릭터에 해당한다. 그 중 은비령/안젤리나(오윤아)에게만 장차 개그 캐릭터로 발전할 씨앗을 심어뒀을 뿐. 그에 반해 강석이 기억을 잃고 난 후 만나게 된 사람들은 대부분이 희극 캐릭터들이다. 복화술(김수미), 복재인(황정음) 모녀는 물론 검찰청의 양 계장까지.

말하자면 어지간히 심각한 드라마라도 한둘은 끼어 있게 마련인 감초 캐릭터들이 <돈의 화신>에는 인물군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아울러 나름 심각한 상황에서도 감초 캐릭터들의 개그는 허용되듯 이 작품 속 희극 담당 캐릭터들도 그저 제 역할만 충실히 하면 된다. 게다가 이 이질적인 두 그룹은 한동안 접점이 많지도 않았다.

여기서 이야기 구조의 묘가 나온다. 그리고 이것이 <돈의 화신>이 조울증을 활용하는 두 번째 기술이다. 이 작품은 크게 네 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각의 챕터는 마치 교향곡의 각 악장처럼 전혀 다른 분위기의 서사가 지배한다. 시작은 장중한 비극이었다. 그러다 강석의 기억상실/성장과 함께 이야기의 정조는 본격 코미디로 바뀐다.



그리고 제 3장, 그러니까 ‘부패검사 이차돈’ 플롯으로 넘어오면서부터 이질적인 두 장르가 만나기 시작한다. 굳이 꼽자면 이 세 번째 챕터는 블랙 코미디에 가까운데, 변덕스런 스케르초가 등장하기도 하는 교향곡의 3악장처럼 여기서 캐릭터들의 변주도 함께 진행된다. 속을 알 수 없었던 차가운 악역 지세광(박상민)이 언뜻언뜻 익살스러워지는가하면 철저히 코미디만 하던 복재인의 진심이 나오기도 한다. 요컨대, 1, 2장에서 각자의 역할로 캐릭터를 숙성시킨 인물들이 본격적으로 하나의 무대에서 만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마치 퓨전 잼 연주처럼 치밀하게 구성된 인물과 이야기의 대비효과, 그 중심에 이강석/이차돈이 있다. 왜냐하면 오직 그만이 극단에 있는 두 세계 모두를 바삐 오가야 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 한 인물의 성격이 조울증을 오가는 것은 캐릭터에게 독이 될 수 있다. 허나 이 드라마에서는 기억상실이라는 단절을 통해 그 함정을 우회적으로 비껴나가는 한편, 두 개의 감정이 동시에 드러나야 하는 3장에 이르러서도 리딩 롤을 맡은 강지환의 연기력을 통해 이를 돌파한다. 마치 조바꿈이 능숙한 즉흥연주가 같달까.

지금까지는 조울증을 어색하지 않게 다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리얼리티’라고 생각해왔다. 웃다가 우는 식의 급격한 감정변화가 드라마에서는 개연성의 문제가 되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은 충분히 자주 일어나지 않는가. 그러니까 인물을 얼마나 현실적으로 구축하느냐에 따라 언뜻 개연성이 부족해 보이는 감정의 파고도 극복할 수 있다는 얘기다. 헌데, <돈의 화신>은 오로지 극작의 방법론만 가지고 이를 타개했다는 점에서, 근래 방영된 드라마들 중 가장 흥미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칼럼니스트 조민준 zilch92@gmail.com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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