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이 삼총사의 다음 스토리가 더 궁금한 까닭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완벽한 해피엔딩이 의미하는 것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옛 영화나 소설을 감상하다가 해피엔딩을 접하면 늘 애매한 감정에 휩싸인다. 단 한 번도 평탄한 적 없는 세계사 속에서 이들은 과연 그 이후에도 행복했을까? 크리스티 소설에서 해피엔딩을 맞는 커플들은 과연 제2차 세계대전에서 무사히 살아남았을까? 그들 중 일부는 독일군의 런던 대공습 때 목숨을 잃지 않았을까?
작정하고 이런 궁금증을 해결해준 작가도 있다. <전망 좋은 방>의 작가 E.M. 포스터가 그랬다. 1958년에 포스터는 이 만족스럽게 해피엔딩으로 끝난 소설 이후 주인공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부록을 통해 그려 보인다. 결코 평온한 삶은 아니다. 그 이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있었고 이들은 결코 그 격동기에서 중립적일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사랑했던 주인공들이 해피엔딩 이후에도 꼰대가 되지 않고 씩씩하게 세상과 버티며 살아남았다니 안심이 된다.
과거 배경의 현대 작품은 이 불안함을 일부러 이용하기도 한다. 올해 첫 공연을 가진 배삼식 작가의 연극 <화전가>의 시대배경은 1950년 4월. 두 달 뒤면 한국전쟁이 발발할 것이다. 이들이 평화롭게 피크닉을 즐기는 동안에도 관객들은 이들에게 닥칠 어두운 미래에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종필 감독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완벽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다. 삼진그룹에서 일하는 상고 출신 세 주인공들은 우연히 목격한 공장 폐수 방류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회사의 미래와 관련된 다른 음모도 밝혀낸다. 보다보면 조금 판타지 같다는 생각도 든다. 대한민국 사회는 단 한 번도 이렇게 만만한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당시에 있었을 법한 현실적인 결말을 냈다면 이렇게 재미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현실에서 어렵다면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라도 해피엔딩을 추구하는 건 중요하다. 올바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승리를 상상할 수 없다면 그건 얼마나 비참할 것인가.
조금 더 단호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다. 특히 후반의 모 재벌 캐릭터가 등장하는 부분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나를 만족시킬만한 단호함은 우리 주인공들의 성격과 맞지 않는다. 이들은, 특히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이자영(고아성)은 그렇게 쉽게 남을 배제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영이 사람을 모으고 설득할 수 있고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었던 건 그런 인간에 대한 믿음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부러울 따름이다.
문제는 이 완벽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의 시대배경이 1995년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가 실제로 1995년에 만들어졌다면 이 해피엔딩은 완벽하게 논리에 맞았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나온 수많은 영화들과 드라마들이 극중 여자들과 여성 관객들에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과 비슷한 밝은 미래를 제시했다. 여자들의 사회진출은 더 가속화될 것이고, 이들을 결국 받아들인 세상은 더 평등해질 것이다. 슬프게도 몇 년 뒤에 외환위기가 찾아왔고 주인공들과 같은 직장 여성들은 가장 먼저 해고 대상이 되었다. 앞으로 다가올 재앙을 알면서 이 영화의 해피엔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사실 영화는 어느 정도 미래를 반영하고 있다. 후반부에서 벌어지는 큰 사건들은 2년 뒤에 일어날 사건들의 전조처럼 보인다. 초중반의 폐수 방출 사건이 1991년 페놀 방출 사건을 모델로 했으니, 이 영화는 1990년대 중반에 시대를 두고 과거와 미래를 모두 품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해피엔딩은 오히려 어느 정도 입체적이 된다. 픽션 속의 완벽한 해피엔딩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어두운 역사와 공존하며 다층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타임머신으로 타고 1995년으로 돌아가 당시의 관객들에게 이 영화를 틀어주었다면 같은 감흥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주인공들에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이 세계의 역사선은 외환위기를 건너뛸 것인가? 그건 좀 재미없는 생각이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삼총사들은 미스터리물의 명탐정들이며, 이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처럼 떨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만약 외환위기가 닥친다면 그건 또다른 모험담의 시작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여기서도 또다른 해피엔딩을 설득력 있게 그려낼 수 있다면 우리는 미래의 자산이 될 수 있는 승리담을 하나 더 얻게 된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