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켓소년단’ 촌스러워도 좋다, 정보훈 작가의 슬기로운 세계관
‘라켓소년단’을 보면 볼수록 정보훈 작가가 점점 더 궁금해진다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솔직히 말해 SBS 월화드라마 <라켓소년단>은 다소 촌스럽다. 땅끝마을이라는 촌을 배경으로 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 전개방식이나 그 이야기가 담는 메시지가 그렇다. 세련되어 보이지 않고 투박하다. 그런데 마치 시골된장으로 끓여낸 된장찌개처럼 그 투박한 맛이 깊다. 배드민턴이라는 스포츠를 다루고, 도시의 삶에서 벗어난 시골의 삶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안에는 정보훈 작가식의 촌스러워도 슬기로운 삶의 인사이트가 넘쳐난다. 마치 한 권의 에세이를 드라마로 풀어놓은 듯한 세계관이다.
경기를 하다 눈을 다쳐 그 약점을 애써 숨기려 했지만, 이용태(김강훈)가 무심코 상대편에게 꺼낸 그 말 때문에 경기에서 지게 된 윤해강(탕준상). 그는 이용태가 전혀 의도 없이 한 말실수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분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그런데 그런 해강에게 마을 지킴이인 신여사(백지원)는 엉뚱하게도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말을 잃어 그게 창피해 집밖에 나오지 않았던 일화를 들려준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고 나는 결심했어. 엄마를 집밖으로 끌어내겠다고. 동네방네 사람들한테 다 말하고 다녔어. 우리 엄마 말 못하는 벙어리라고.”
신여사는 어머니가 처음에는 화를 내다 나중에는 고마워했다고 했다. 들키면 죽을 것 같았던 비밀이 동네방네 다 알려지자 살 것 같더라는 것. “물론 비밀은 지켜져야지. 근데 아주 가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더라고.” 이 에세이에 나올 법한 이야기는 윤해강이 자신의 약점이라 꽁꽁 숨기려 했던 눈 부상이, 이용태에 의해 알려지게 된 걸 오히려 ‘좋은 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다 알려졌으니 숨기려 애쓸 필요도 없고, 그걸 노리는 상대편 선수들에게 오히려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결국 이 신여사의 이야기로 윤해강은 이용태와 화해한다.
배드민턴이라는 스포츠를 소재로 하고 있는 <라켓소년단>은, 최근까지도 스포츠계에 고질적인 병폐로 논란이 되었던 감독, 코치의 폭력과 비리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정보훈식의 인사이트를 담아 넣는다. 하얀늑대로 불리는 배감독(신정근)이 과거 선수들을 체벌해 결국 유망주들도 선수생활을 포기하게 됐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알고 보니 당시 폭행의 주범은 천코치(허성태)였다는 게 밝혀졌다. 대신 배감독이 누명을 뒤집어쓰고 물러났던 것. 천코치는 여전히 학부모에게 돈을 요구하고, 촌지를 주지 않으면 해당 학생을 괴롭히며 체벌도 일삼는다. 그러면 성적이 오른다며.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윤현종(김상경)과 배감독은 천코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아이들을 이끈다. 그런 강압에 의한 훈육이 아니라, 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아이들에 대한 신뢰가 그것이다. 윤해강과 이용태 사이에 벌어졌던 갈등이 고민이라는 윤현종에게 배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다른 거 말고 믿어봐 애들.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애들 믿어 보라고.” 결국 천코치의 문제들이 공론화되면서 사태는 해결되지만, 정보훈 작가는 윤현종의 입을 빌어 자신이 하고픈 스포츠계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보탠다. “선수든 지도자든 협회든 책임감을 갖고 방법을 찾아야죠. 똑같은 실수가 다신 반복되지 않게.”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겪고 이 땅끝마을에 죽으러 내려온 도시남편(정민성)과 아내(박효주)가 죽으려 하지만 동네에 자신들이 챙겨야할 일들이 많아 죽지 못하는 에피소드는 프레드릭 배크만이 쓴 <오베라는 남자>를 떠올리게 한다. 도움이 필요한 동네사람들이 눈에 밟혀 가려던 길을 멈추고 그 일을 돕다 보니 저도 모르게 삶의 의욕이 생겼다는 것. 이것은 삶이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받는 것보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는 것이 더 행복할 수 있고 가치 있을 수 있다는 걸 담는 에피소드다.
결국 이 이야기는 신여사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에피소드와 연결된다. 한 평생을 쉬지 않고 일해 동네의 땅과 집 대부분을 소유하게 된 할머니는 그걸 도시에 살며 얼굴 한 번 내밀지 않는 자식들이 아닌 함께 살아온 신여사와 동네 이웃들과 나누고는 세상을 떠난다. 그런 가족들에게 겪은 상처 때문에 외지인에 대한 경계심을 갖고 있던 신여사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도시남편과 아내가 살뜰히도 자신들을 챙겼다는 걸 알게 된다. 결국 할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외지인들에게 집을 빌려주는 걸 허락한 신여사는 자신의 집 대문을 없애고 도시아내와 언니 동생하는 사이가 된다.
정보훈 작가가 땅끝마을의 배드민턴하는 소년들과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전하는 이야기는 마치 동화처럼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선악구도가 명확하고, 결국은 선의가 통한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이 소박하고 투박하게 느껴지는 건, 언젠가부터 선의를 믿지 않게 된 세태 때문이다. 선이나 정의가 이긴다는 믿음은 여러 차례의 배신들을 목격하면서 깨져버렸다. 그래서 드라마 속 주인공들도 더 이상 선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악이라 자처하고 그래서 저 거대한 악의 카르텔과 싸워 이길 수 있다 말한다.
<라켓소년단>은 그래서 마치 동화처럼 보이고, 그 해결방식들은 권선징악을 믿는 촌스러움과 소박함을 갖고 있다. 당연히 이 드라마가 강렬한 자극이나, 눈을 뗄 수 없는 몰입감을 주기는 어렵다. 하지만 찬찬히 보고 있으면 저것이 이상처럼 보일지라도, 저런 세계에서 살아가고픈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아마도 저런 이상향이 도시에서 한참 떨어진 땅끝마을까지 가야 비로소 그려볼 수 있다는 설정은, 이런 선의가 통하지 않는 삶의 문제들이 도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작가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어떤 비평가가 말했다. 좋은 작품은 읽고 나면 그걸 쓴 사람이 만나보고 싶어지는 그런 작품이라고. <라켓소년단>을 보면 정보훈 작가가 어떤 사람일 것이라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런 작가와 만나 잠시라도 따뜻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진다.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자극 가득한 드라마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마음이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S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