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지 않고서야’ 보라, 욕먹는 문소리·정재영 뒤 누가 웃고 있는지
‘미치지 않고서야’,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노동자들의 송가
[엔터미디어=TV삼분지계] ◾편집자 주◾ 하나의 이슈, 세 개의 시선.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대중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는 남지우·이승한·정석희 세 명의 TV평론가가 한 가지 주제나 프로그램을 놓고 각자의 시선을 선보인다. [TV삼분지계]를 통해 세 명의 서로 다른 견해가 엇갈리고 교차하고 때론 맞부딪히는 광경 속에서 오늘날의 TV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는 단초를 찾으실 수 있기를.
<송곳>만큼 날카롭고 <미생>만큼 처절하다. MBC <미치지 않고서야>는 기존의 오피스 드라마들이 잘 들여다보지 않는 인사팀 직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고용불안이라는 공포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매각을 앞둔 가전사업부의 고용인력을 대폭 감원해야 하는 임무를 받고 본사에서 파견된 인사팀장 당자영(문소리)과, 사내 파워게임에서 밀려 뜬금없이 인사팀으로 발령받은 엔지니어 출신 인사부장 최반석(정재영) 모두 ‘내일도 출근할 수 있는 직장’이 간절한 사람들이다. 누군가는 병든 아버지 간병비를 벌어야 하고, 누군가는 혼자 먹여 살려야 하는 어머니와 어린 딸이 있고, 그래서 내키지 않는 업무지만 사력을 다해서 해내야 하는 이 상황. 다른 직원들은 인사팀 직원들을 ‘칼잡이’라고 부르며 피하지만, 인사팀 직원들 또한 목구멍이 포도청인 노동자인 것은 매한가지다.
[TV삼분지계]의 세 평론가는 작품을 어떻게 봤을까? 정석희 평론가는 “직장 내 문제들을 마치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생생히 전달해” 주는 작품의 리얼리티에 찬사를 보내며, 결국엔 이 모든 게 제 자리에서 버텨내기 위한 발버둥이라는 점을 각자 다른 인물의 관점에서 그려낸 작품의 균형감각에 감탄한다. 남지우 평론가는 작품이 노동자들의 목표와 처우가 저마다 다르고 복잡한 부분을 성실하게 그려내는 모습에 주목하며, 작품이 “노동을 복잡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잘 그려낸 드라마 덕분에 시청자들이 “우리가 놓인 세계의 자장을 어느 순간 알아차리게 될 것”이라 극찬했다. 이승한 평론가 또한 작품이 “‘노동자’와 ‘노동자’가 싸우도록 만들어 자신들 선까지 리스크가 오지 않도록 노무를 관리하는 자본의 전략을 폭로한다”고 평하며, 욕먹는 인사팀 뒤에 숨어 인자하게 웃고 있는 것이 자본가 한승기 사장(조복래)이란 점을 짚어냈다.
◆ 어떻게든 버텨야 하는 이들의 노래
정년을 앞둔 직장인의 심경이 어떤지, 희망퇴직이 거론되는 회사 분위기는 어떤지 다녀본 적 없으니 알 길이 없다. 그저 보고 들은 얘기로 짐작이나 할 뿐. <미치지 않고서야>는 경험해보지 않은 직장 내 문제들을 마치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생생히 전달해준다. 분명 무거운 주제인데 피식피식 웃게 만드는 재주도 있다. 이 모든 중심에 22년 차 개발자 최반석(정재영)이 있다. 이제는 문신 같아진 체크 난방 차림의 배우 정재영은 타고날 때부터 최반석이었던 듯 무심하면서도 자상하다.
숱한 히트 상품과 특허를 보유했다는 최반석의 현재 직책은 어이없게도 인사팀 부장이다. 계륵 같은 존재일 경우 이런 황당한 인사가 가능한 모양이다. 인사 업무에 대한 지식이 1도 없는 그가 주어진 일마다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다시 개발자로 돌아가기 위해서다. 어떻게든 버텨야 하니까. 위기의 순간마다 딸 선이를 떠올리는 최반석. “본인 밥그릇은 본인이 지키는 거지. 그런 깡다구 없이 직장 생활을 어떻게 해요.” 최반석은 한세권(이상엽) 팀장에게 제안서를 빼앗기고 팽까지 당한 어혜미(유정래) 선임을 위로한다. 어쩌면 스스로를 향한 다짐일지도 모르겠다.
드라마에서 이처럼 인사 업무의 고충을 본격적으로 다룬 적이 있었던가? 업무 능력, 성향, 개인사를 사찰해 꼼꼼히 기록하고 인사고과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인사팀은 대체로 악역이지 않았나. 그러나 이번엔 무려 주인공이다. 인사팀 팀장 당자영(문소리)이 40% 감원 전략에 매진하는 이유는 단지 위에서 시켰기 때문이다. 딱히 애사심이 남다른 것도 아니고 못된 성정이어서도 아니다, 당자영은 힘들 때마다 병석에 누워 계신 아버지를 떠올린다. 모두가 서로 다른 이유로 버티고 또 버틴다. 버텨내는 자가 결국엔 승자, 만고불변의 진리이지 싶다.
정석희 TV칼럼니스트 soyow59@hanmail.net
◆ 노동의 세계
이 드라마, 정말 재밌다. 웨이브로 누운 자리에서 다섯 회차를 몰아보고, 어젯밤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TV 본방사수를 준비했다. <미치지 않고서야>는 동 시간대 <슬기로운 의사생활2>에 밀릴 이유가 없는 잘 빠진 언더독이다. 22년 차 엔지니어로 분한 배우 정재영이 영화 <암수살인>(2018)의 형사 김윤석 이후 최고의 ‘직업인 연기’를 선보이는 한편, 배우 이상엽은 캐릭터의 입체성에 힘껏 숨을 불어넣고 있다. 이상엽의 매력에 빠져 최근 그가 합류한 tvN 예능 <식스센스2>까지 보고 나니, 여성 캐릭터들의 주변부에서 언제나 제 몫을 다해온 그의 필모그래피가 더욱 빛나 보였다.
모든 오피스 드라마는 결국 동시대 노동에 대한 풍속도로 귀결된다. JTBC의 <송곳>(2015)이나 부지영의 영화 <카트>(2014)에서 보았던 쟁의와 투쟁만이 노동의 세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미치지 않고서야>가 여타의 오피스 드라마보다 훨씬 더 노골적인 풍속도로서 기능하는 이유는, 회사 인사팀 소속의 주인공들이 유례없이 전면에 나서는 덕분이다. 인사팀이 쥐고 있는 칼자루가 노동자들을 다방면으로 위협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만, 그 덕분에 (문소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사쟁이’들은 많은 극에서 악역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지만, 이 드라마는 그러한 인사팀마저도 또 다른 종류의 부당함에 맞서는 노동자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일깨운다.
누군가는 희망퇴직의 대상자가 되어 회사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쏟아내지만, 동시에 누군가는 회사를 떠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 누군가는 혹독한 취업난의 패배자로 남지만, 누군가는 정규직 제안을 거절하며 자발적 계약직으로 남는다. 또 누군가는 괜찮은 능력을 갖추고도 원치 않는 부서로 발령이 나버리지만, 동시에 누군가는 사내 성추행을 저지르고도 실력자라는 이유로 꼿꼿이 자리를 지킨다. 바로 이것이 노동의 복잡성이며, 노동을 복잡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속성이다. 정도윤 작가는 이 어두운 사실을 감칠맛 나고 통통 튀는 대사들을 통해 전달하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기교를 선보인다. 덕분에 우리는 금세 TV 앞에 끌려가, 우리가 놓인 세계의 자장을 어느 순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남지우 칼럼니스트 Instagram @jmbar_jwjw
◆ 보라, 욕을 먹는 인사팀 뒤에 숨어 누가 웃고 있는지
직장인들 사이에서 도는 도시전설 중 “인사팀에서 일하는 사람은 죄다 사이코패스”라는 말이 있다. 내가 일터에 바친 노력과 공헌들을 숫자 몇 개로 수치화해서는 연봉 인상폭을 후려치고, 경기가 어려워지면 피도 눈물도 없이 회사를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러고도 오늘 점심 뭐 먹지 고민할 기분이 들까? <미치지 않고서야>는 바로 그 ‘사이코패스’라 불리는 인사팀 사람들의 애환을 다룬 작품이다.
당자영 인사팀장(문소리)은 곧 매각을 앞둔 한명전자 창인사업부의 정규직 고용규모를 현 80%에서 40%대까지 낮춰야 하는 임무를 받았다. 말도 안 되는 감축 규모를 듣고는 “이 나라에는 노동법이라는 게 있다”고 저항해보지만, 위에서 까라면 까야 하는 힘없는 직장인인 것은 인사팀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어쩌랴. 일단 직무역량평가로 줄 세우기라도 하는 수밖에. “칼잡이”, “저승사자”라 불리며 사람들의 눈초리를 사고, 개발자로 한 평생 살다가 뜬금없이 인사팀으로 밀려난 인사부장 최반석(정재영)은 동료들에게 “변절자”라는 말까지 들어가면서, 끝없는 자괴감과 싸우며 창인사업부 인사팀은 제 할 일을 한다.
노동문제를 다루며 ‘가혹한 자본가와 단합된 노동자’의 구도를 가져갔던 다른 작품들과 달리, <미치지 않고서야>는 ‘노동자’와 ‘노동자’가 싸우도록 만들어 자신들 선까지 리스크가 오지 않도록 노무를 관리하는 자본의 전략을 폭로한다. 직장을 지켜내야 하는 다른 ‘사우’들과는 달리, 인사팀은 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동료 직원들을 평가하고 때로는 잘라내야 하는 것이 업무의 본질이다. 마치 재개발 구역을 부수고 선주민들을 폭행하는 철거반원들의 상당수가 자신 또한 그것 말고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사회적 약자인 것처럼, 자본을 향해 쏟아져야 하는 노동자들의 분노는 상당부분 그 자신도 노동자인 인사팀이 1차적으로 흡수한다. 이 끔찍한 싸움의 광경을 미소를 지으며 치하하는 게 한승기 사장(조복래)이라는 건 많은 것을 알려준다.
결국 <미치지 않고서야>가 던지는 메시지는 이게 아닐까? 우리끼리 눈앞에 보이는 싸움을 하며 서로 미워하고 삿대질하는 동안, 진짜로 웃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고. 각자가 살아남기 위해 서로 밀쳐내며 발버둥 치는 것을 넘어서, 함께 살아남기 위한 답을 찾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고.
이승한 칼럼니스트 tintin@iamtintin.net
[사진·영상=MBC. 그래픽=이승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