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호에게도, 나영석에게도 기존 예능판이 너무 좁아졌다는 건
뻔하고 식상해진 기성 예능판의 정체, 변화는 시작됐다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이미 판도는 기울었다. 한때 지상파, 케이블, 종편이 플랫폼의 중심이던 시대가 있었지만, 이제 이 플랫폼들은 레거시 미디어가 되어가고 있다. 그 징후들은 곳곳에서 나온다. 넷플릭스, 웨이브, 티빙, 왓챠 같은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가 이제 콘텐츠 소비의 주력 플랫폼으로 서고 있고, 유튜브나 인터넷TV(카카오TV, 네이버TV 같은)가 대안적 미디어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드라마 분야는 일찍이 이런 변화들을 경험하며 플랫폼 다변화를 받아들였다. KBS <태양의 후예>가 중국 자본을 끌어들여 블록버스터 K드라마의 가능성을 타진한 이후, tvN <미스터 션샤인> 같은 작품이 넷플릭스의 투자를 받아 동시 방영을 성공시켰고, 이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글로벌한 반향을 일으키는 <킹덤>, <스위트홈>, <오징어 게임> 같은 작품들을 내놨다. 드라마 분야가 이렇게 OTT 체제로 달라지는 환경에 빨리 적응한 건 외주 제작사 형태로 위기를 더 체감했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서 재빨리 변화에 적응한 것.
하지만 상대적으로 방송사에 소속된 PD들이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예능 분야는 이러한 변화에 대한 적응이 느리다. 이미 현업에서 뛰고 있는 예능 PD들은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지상파, 케이블, 종편의 플랫폼이 갖는 소재, 표현의 한계는 물론이고, 좀 더 공격적인 기획이나 이를 뒷받침 해주는 자본 투자 그리고 그 리스크를 줄여줄 수 있는 글로벌 네트워크도 없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시청자들의 눈이 이미 OTT나 유튜브 같은 뉴미디어쪽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러니 예능 PD들은 답답하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싶다. 그건 새로움에 대한 갈증이면서 동시에 그래야 앞으로 크리에이티브에 종사하는 자로서 생존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섞여 있다.
최근 김태호 PD가 MBC 퇴사 결정을 공식화한 건 그래서 이런 변화의 징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간 케이블, 종편으로 지상파 예능 PD들이 대거 이동하던 시기에도 김태호 PD가 MBC를 지켰던 건 <무한도전>이라는 레전드 예능 때문이었다. 바깥에 나가는 순간 <무한도전>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다는 사실은 그가 머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역시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정체되어가는 걸 느꼈고, 결국 시즌 종영을 선택했다.
그리고 돌아온 <놀면 뭐하니?>로 그는 유튜브 같은 뉴미디어로 인해 변화된 환경에 맞는 새로운 예능을 시도했다. 그렇게 ‘부캐’ 트렌드를 만들어내며 <놀면 뭐하니?>를 성공시켰지만, 그것이 계속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래서 김태호 PD의 퇴사 결정은 최근 <놀면 뭐하니?>가 과거 <무한도전> 시절로 회귀하고 있는 것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건 김태호 PD에게는 퇴행에 가까운 일이고, 이 변화의 물결 속에서 도태될 수도 있는 위기감을 주기에 충분한 일이기 때문이다.
김태호 PD는 OTT와 유튜브를 모두 포함해 그 달라진 플랫폼 속에서 다양한 예능들을 선구적으로 도전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욕망이 아니라 생존욕구에 가깝다. 단 몇 년 사이에 환경 변화는 급격하게 일어났고, 그래서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변화하지 않는 기성 미디어들의 한계는 더 도드라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영석 PD도 이런 변화 상황을 정확히 읽고 있다. 그는 물론 여전히 CJ ENM에 소속되어 있지만, 일찍이 시즌제 방식을 정착시켰던 그로서는 김태호 PD처럼 매주 숙제처럼 프로그램을 루틴하게 만들어낼 이유는 없다. 이우정 작가를 중심으로 신원호 PD와 나영석 PD가 함께 꾸려가는 에그 이즈 커밍이 실질적인 하나의 스튜디오라고 봐도 무리가 없는 상황이다.
나영석 사단은 그래서 일찍이 유튜브에 채널 십오야를 열고 그 플랫폼에 최적화된 숏폼들을 실험해 왔고, tvN 같은 케이블 플랫폼에서는 해왔던 방식의 예능 프로그램들(이를 테면 <슬기로운 산촌생활> 같은)을 만들었다. 그리고 티빙 같은 OTT를 통해서도 <신서유기 스프링캠프> 같은 프로그램을 시도했다. 아직 OTT라는 플랫폼에 걸맞는 완전히 색다른 기획을 선보이지는 않았지만 언제든 다양한 시도들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는 상황이다.
김태호 PD도 나영석 PD도 이제는 기성 플랫폼들이 너무 좁다는 걸 체감하고 있고, 여기에 대처해 나가고 있다. 실제로 최근 예능 프로그램들은 양적으로는 엄청나게 늘었지만 이렇다 할 굵직한 프로그램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형식만 봐도 관찰카메라, 스포츠, 먹방, 오디션이 대부분이라는 점은 그 정체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잘 보여준다. 그 형식들은 창의적인 기획의 성공이라기보다는 엿보기, 스포츠 자체, 음식, 경합 같은 그 형식이나 소재 자체의 힘에 기댄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기성 플랫폼들이 뉴미디어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오디션이나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도 뉴미디어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최근 성공사례로 꼽히는 Mnet <스트릿 우먼 파이터>는 유튜브에서의 화제성이 그 성공의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이제 일상적으로 나오는 멘트는 ‘유튜브 조회수’가 됐다. 이처럼 플랫폼의 힘이 현저히 밀려나고 있는 현실 앞에 지상파나 케이블, 종편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현실적으로 당장의 플랫폼을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대신 플랫폼이 박제화되지 않기 위해 콘텐츠 회사로서의 변화를 도모하지 않는다면, 플랫폼의 약화는 더 가속화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특히 예능 PD들처럼 크리에이티브가 하나의 생명력이라 할 수 있는 직업군을 기성 플랫폼의 틀에 끼워 넣어 두는 건 여러모로 손실과 리스크가 큰 일이 되고 있다. 고사하거나 탈출하는 것이 그 결과일 수 있으니.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MBC, tvN, 넷플릭스, TVING, 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