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스물하나’는 모든 것이 예쁘다
‘스물다섯 스물하나’, 사랑스럽고 예쁜 청춘물로 사랑 받는 이유
[엔터미디어=김교석의 어쩌다 네가] tvN 주말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영원할 것처럼 뜨겁고 쨍했던 순간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보는 것 같다. 의도적인 1990년대풍 주제곡이나 오프닝 영상, 자막 등 일종의 치트키 같은 90년대를 꺼내 들어서만은 아니다. 스크린쿼터 사수 시위를 비롯해 IMF 시절의 풍경을 배경 삼고, 오렌지족의 표상과 같던 빨간색 오픈카, <유브갓메일>을 연상케 하는 PC통신 비밀 친구와 해적방송, 순정만화 <풀하우스>와 일본 스포츠만화의 모티브, 90년대 패션 등 그 시절 흔적들이 펼쳐지지만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90년대는 복고, 추억의 전시장이라기보다 현실에서 벗어난 어떤 다른 세계를 그려내는 만화적 공간으로 다가온다.
고증을 통한 핍진한 리얼리티를 재미의 한 축으로 삼은 <응답하라> 시리즈와 다르게 90년대를 소화하는 셈인데, 초점은 그 시절에 대한 추억이나 신기함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그 시절 트렌디드라마의 감수성을 복원하는 데 맞춰져 있다.
특히 10화의 기획된 바닷가 수학여행을 보면서 90년대의 전설적인 트렌디드라마 <느낌> 6화가 떠올랐다. 손지창, 김민종, 류시원, 이정재, 이본, 이재은, 우희진 등등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와 라이징스타가 결집한 이 드라마의 주요 출연진이 모두 함께 시원한 바다로 여름 여행을 떠난다. 사실 극의 전개상 굳이 필요 없는 설정이지만, 시원한 바다, 파도와 모닥불 앞에 화려한 배우들을 모아 놓은 시청자들을 위한 보너스 영상인 동시에 사랑의 짝대기가 엇갈린 등장인물들의 다음 전개를 위한 감정 표출의 장이었다.
마찬가지로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도 탁 트인 바닷가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즐기고, 사랑의 감정은 깊어지고, 몰랐던 아픔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한 걸음씩 다가간다. 일종의 일탈 시퀀스는 그 시절 청춘물의 전형이다. 붉은색으로 물든 해질녘 탁 트인 바다 앞에 나란히 앉은 청춘들이 “살 수 있는 게 왜 없어. 이 여름은 공짜야, 이거 사자, 이 여름은 우리 거다!”라고 외치고, ‘영원’을 다짐하며 90년대 감성을 꾸밈없이 터트린다. 그런데 전혀 촌스럽거나 유치하거나 식상하지 않다. 어떻게 보면 익숙하고 뻔한데, 청춘 로맨스에 동할 처지가 아닌 사람들도 가슴속의 메트로놈이 빠른 박자로 요동치게 만든다.
마르떼프랑스와저버, 프로스펙스, 노티카, 엘레세 등등 90년대 패션과 빈티지가 2020년대 패션 트렌드로 다시 돌아왔다지만, 장롱 저 너머 어딘가 처박혀 있던 그 시절 옷을 꺼내 입는다고 패션으로 받아들여지진 않는다. 마찬가지로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90년대를 풍경이나 배경 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전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옛 감성의 매력을 원천 삼아 오늘날의 정서가 깃든 감수성으로 리뉴얼하는 데 성공했다.
전작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에서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그들의 우정과 경쟁에 초점을 맞췄던 권도은 작가는 이번엔 청춘물, 로맨스물의 스테레오타입화된 성역할을 뒤집고 남녀 주인공의 러브라인에 집중된 플롯을 분산시킨다. 우선 극의 전개와 메인 플롯은 나희도(김태리)의 성취를 중심축으로 전개된다. 남자 주인공인 백이진(남주혁)이 4살이나 많지만 서로 반말하는 동등한 관계이며, 심지어 키다리 아저씨나 외제차 타는 ‘실장님’이 아니라 IMF로 부도가 나고 풍비박산 난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 일종의 캔디 과로 서로서로 도움을 주고 의지하는 관계로 성장한다. 희도의 코치 양찬미(김혜은), 나희도의 엄마 신재경(서재희) 등 극중 어른 역할 또한 모두 여성이 맡는다.
두 남녀의 러브라인보다 이 드라마의 청량한 분위기를 담보하는 장치는 등장인물들이 이루는 일종의 우정 공동체다. 이들에게 얼마나 속하고 싶게 만드느냐, 얼마나 지켜보고 싶게 만드느냐가 주연 배우들의 로맨스라인보다 분위기를 만드는 데 훨씬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유사 가족을 이루는 친구들을 병풍이 아니라 주인공의 희도만큼이나 하나의 복합적 감정과 서사를 가진 인물로 세심하게 그려낸다.
편모슬하의 나희도가 좌절된 유망주라는 아픔과 엄마와 갈등을 겪고 있는 것처럼 그 시절이 그렇듯 각자 자기만의 문제와 아픔을 안고 산다. 전교 1등에다 반장인 엄친아 지승완(이주명)은 제도권의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해적방송을 운영하며 교내 아지트를 갖고 있다. 교내 최고의 인기남 문지웅(최현욱)은 당시 흔치 않던 부모가 이혼한 아픔을 겪는 중이다.
이런 세심한 캐릭터의 정점은 고유림(김지연)이다. 일반적으로는 삼각관계로 보나 성장 서사로 보나 악역의 자리인데, 최고의 자리에 올라선 거만함과 독선, 열등감과 연민, 반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갖춘 입체적인 인물로 그린다. 그뿐 아니라 나희도와 우정이란 이름의 서브 멜로라인까지 소화한다. 각자 사연이 있지만 캐릭터 빌드업에 있어 그늘에 집중하지 않는 점도 흥미롭다. <거침없이 하이킥> 시리즈처럼 마지막 충격 반전을 위한 <유주얼 서스펙트>급 전략인지, 신파나 갈등 같은 기존 장르적 코드를 비틀어낸 선택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덕분에 순도 높은 청량함을 즐길 수 있다.
특히 이 청량함은 캐릭터를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찰떡 캐스팅과 배우들의 호연에서 시원하게 터진다. 극중 캐릭터들도 성장하지만 이 드라마가 특별한 이유 중 하나가 배우들의 성장을 함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다양한 작품에서 이미 빼어난 연기를 보여준 김태리는 이 드라마를 통해 보석과 같은 존재감을 다시 한번 발산한다. 타이틀롤을 맡을 수 있는 주연급 배우들 중 많은 수가 어떤 배역을 맡든 자기만의 성을 구축하고 그 안에서 머무르는 경우가 많은데, 김태리는 늘 배역을 창조한다는 점에서 무척 특별한 배우다. 이번에도 순수 발랄한 여고생이라는 극중 캐릭터에 맞춘 연기와 얼굴로 극을 이끌어가는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확인했다.
남주혁은 무지개가 필요 없는 것처럼 연기가 필요 없다. 우리가 아는 남주혁의 모든 매력이 캐릭터에 투영되어 있다. 간간이 연기력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 자신에게 맞는 완벽한 핏의 캐릭터를 창조하면서 극의 분위기를 만드는 배우로 성장했다.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연기와 캐릭터 중 가장 살아 있고 매력적이다.
우주소녀 보나로 잘 알려진 김지연은 올해의 발견이다. 그간 연기활동의 대부분을 깨발랄 캐릭터로 맡아왔으나 우아한 마스크의 도도한 분위기 아래로, 무척 다양한 감정을 입체적으로 드러내면서 매력을 잃지 않는 까다로운 캐릭터를 설득력 있고 사랑스럽게 소화하면서 배역으로 대중에게 각인되는 완벽한 연기 결과물을 남겼다. 김지연이 연기한 고유림 캐릭터는 그간 봐온 청춘물 서브여주 중 가장 흥미롭고 매력적인 인물 중 한 명이다. 이렇다 보니 방송을 시작하고부터 남주혁과 김태리, 김지연은 화제성 지수 조사에서 드라마 출연자 부분 톱 5안에 늘 함께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 드라마가 사랑스럽고 예쁜 청춘물로 사랑을 받는 이유는 익숙하고 뻔한 것 같지만 각 캐릭터들이, 그리고 장르적 클리쉐를 비틀고 가는 빌드업 방식이 무척 새롭다는 데 있다. OTT부터 지상파까지 드라마에서 예능까지, 로맨스의 시대에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유독 큰 사랑을 받는 이유다. 익숙한데 신선하고, 성장의 테를 확인할 수 있어서 청량함이 휘발되지 않고 여운으로 돌아온다.
지난달 12일 첫 방송부터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놓치지 않고 있고, 5주 이상 드라마 부문 화제성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시청률도 이미 10%를 넘어섰다. 배우들의 호연, 아름다운 얼굴, 익숙한 서사의 틀과 감수성에 변주를 가미해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는 감수성과 분위기를 만들어낸 결과다. 상처와 아픔도 있지만 성장하는 그들에게 이 또한 찰나에 불과하기 때문일까.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모든 것이 예쁘다.
칼럼니스트 김교석 mcwivern@naver.com
[사진=tv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