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을 비웃는 ‘맏이’ 김정수 작가의 저력
2013-10-28 정덕현
김정수의 ‘맏이’, 중견 작가란 이런 것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역시 김정수 작가다. <전원일기>를 20여 년간이나 쓴 저력에 <쑥부쟁이> 같은 문학에 가까운 필력을 더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르겠다. 자극적인 막장드라마들이 쏟아져 나오는 통에 한동안 주춤했던 김정수 작가가 모처럼 들고 온 JTBC 주말드라마 <맏이>가 그 따뜻하고 착한 김정수표 드라마를 통해 종편에서는 꽤 높은 수치인 4%의 시청률을 내고 있다는 것은 실로 중견의 저력을 보여주는 일이다.
<맏이>는 과거 장미희가 억척엄마로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던 <육남매>의 2013년 버전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이다. <육남매>의 이관희 감독이 다시 메가폰을 잡았고, 장미희 역시 드라마 초반에 폐병을 앓으면서도 양반으로서의 기품을 지키며 죽음을 맞이하는 이실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했다.
하지만 <육남매>와 <맏이>는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인공이 전혀 다른 드라마다. <육남매>는 남편을 잃고 홀로 여섯 남매를 키워내는 엄마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맏이>는 부모를 모두 잃고 동생들을 떠안게 된 맏이가 모든 걸 희생하며 가족을 부양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아이가 아이를 보살피는 이야기는 그 소재적 특성상 훨씬 강해졌지만 김정수 작가 특유의 따뜻한 시선은 자극이 아니라 감동으로 드라마를 이끌어낸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이 오남매가 살아가는 동네 주민들의 따뜻함 때문이다. 이실처럼 어린 영선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는 인물도 있고, 고모(진희경)처럼 현실을 일깨워주는 인물도 있으며, 내세울 건 양반출신이라는 것밖에 없지만 그래도 사람 구실이 뭔지는 아는 순택부(이달형)나 그의 아내로 아들 순택(재희)의 뒷바라지를 하는 반촌댁(윤유선), 하다못해 자신의 출세를 위해 나쁜 짓도 마다않는 지역의 유지이자 의원인 상남(김병세)조차 자기 집에 얹혀사는 오남매를 내치지 않는 그래도 인간 냄새나는 인물들이다.
즉 <맏이>의 오남매를 키워내는 장본인은 물론 맏이인 영선(윤정희)이지만 이 드라마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주민이라는 좀 더 큰 가족개념을 보여준다. 드라마 초반에 이 힘들고 가난한 시절이 물질적으로 풍요한 현재보다 더 살만하다 여겨지게 됐던 것은 바로 이 마음 공동체의 온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정수 작가가 <맏이>를 통해 하려는 이야기는 그저 이런 향수와 추억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통해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연결고리와 그 의미를 찾아내는 일. 이것이 <맏이>가 왜 지금 시대에도 의미를 갖게 되는가 하는 이유다.
이 마을공동체 같은 따뜻한 가족개념을 보여주는 시골동네에 공단이 유치되고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도시로 떠나가는 이야기는 당대의 변화가 어떻게 우리네 삶을 뒤바꿔 놓았는가를 정확히 드러낸다. 도시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영선의 오남매가 서울 달동네로 이사하는 이야기나, 순택이 유신정권 하에서 데모대에 휩쓸려 고초를 겪게 되자 순택의 아버지가 의원인 상남을 찾아가 부탁을 하기 위해 양반 따위는 던져두고 춤을 추는 장면, 또 그가 자존심처럼 쥐고 있던 한학책들을 불사르고 상투를 자른 후 마을을 떠나는 이야기는 그 변화의 순간들을 포착해낸다.
따라서 <맏이>는 한 가족의 생존기이면서 동시에 한 시대의 변화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시대극으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고 있다. 드라마 한 편이 60년대부터 90년까지의 근대사를 압축하고 있는 것. 중요한 것은 이 근대사를 보여주는 김정수 작가 특유의 휴머니즘적 관점이다. 사랑과 야망의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김정수 작가는 그 기저에 놓여진 인간을 놓치지 않는다. 따라서 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따뜻함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 중견작가들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를테면 문영남 작가나 임성한 작가가 중견이라는 위치의 필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힘을 자극적인 캐릭터나 설정을 만들어 시청자들을 낚는 데 사용하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시청률?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중견작가 정도라면 적어도 후배작가들이 보고 고개를 끄덕일만한 작품이어야 하지 않을까.
김정수 작가가 써내려가고 있는 <맏이>라는 작품은 그래서 작금의 중견작가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들은 과연 김정수 작가가 작품을 통해 보여주듯 최소한의 시청자들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있을까. <맏이>는 실로 김정수 작가만이 쓸 수 있는 따뜻함을 갖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 오남매와 그들을 둘러싼 유사가족들의 삶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야심작이기도 하다. 중견의 저력이란 이런 것이다. 시청률 몇 프로가 아니고.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이관희 프로덕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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