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현·이연희를 거부한 간 큰 아저씨들에게
2014-01-17 김교석
‘감격시대’, 무려 150억 투자한 KBS에 박수를
[엔터미디어=김교석의 어쩌다 네가] 엉뚱 발랄한 슈퍼스타 천송이(전지현)의 고백도, 어쩌다 미스코리아에 도전하게 된 오지영(이연희)의 변신을 지켜보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재벌가와 연예계를 배경으로 한 화려한 로맨틱코미디도, 다양한 인간군상의 결을 보여주면서도 비교적 서민적이라 할 수 있는 따뜻한 로맨틱코미디도 좋다. 예쁜 여배우들을 동시간대에 수준 높은 이야기 속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자 고뇌의 씨앗이다. 쌉싸름한 시대를 위로하는 달달한 드라마들은 그래서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애당초 단맛을 모르는 이들이 있다. 쌉쌀한 걸 잊는 데 단맛이 아니라 쓰디쓴 술 한 잔과 고지방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있다. 야식으로 타르트와 족발을 선택하는 사람 간의 취향 차이랄까. 달달한 로맨스는 결코 가까이 해서는 안 될 누나의 순정만화 같고 전지현과 이연희는 예쁘긴 예쁘지만 어차피 TV에는 다 예쁜 여자연예인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번 주 지난 수요일부터 천송이와 도민준(김수현)의 신드롬이 화제를 낳는 밤에도 심드렁하고 무료하게 리모컨을 굴리던 배척된 취향을 가진 이들을 위한 새로운 선택지가 떠올랐다.
‘상하이 느와르라고나 할까’로 시작되는 기획 의도는 KBS 새 수목드라마 <감격시대: 투신의 탄생>의 수컷 정서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 드라마는 1985년 스포츠 신문에 연재된 적 있는 방학기 화백의 동명 만화를 각색한 이른바 김두한, 시라소니 시대의 주먹들 이야기다. <장군의 아들>과 <야인시대> 등으로 친숙한 일제 말기부터 독립 직후까지 건달들을 ‘낭만’으로 규정하고 ‘낭만 주먹들이 몰려온다’며 주먹을 움켜잡고 눈을 치켜뜬다. 주인공 신정태(김현중, 아역 곽동연)는 만주에서 경성까지 ‘독고다이’로 평정해온 시라소니를 모티브로 삼은 가상의 인물인데, 일제와 맞선다는 설정에서는 김두한의 전설까지 믹스한 듯하다.
그래서 <별에서 온 그대>의 김수현이 좋은 집에서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옷을 입고 언제나 새하얀 얼굴로 단정하게 있다면, 김현중과 그의 아역 곽동연은 항상 너절한 옷에 때가 묻거나 상처가 낫거나 피를 묻히고 있다. ‘옷빨’ ‘머릿빨’ 따위는 상관없고 때때로 상의 탈의를 불사하는 야성적인 주인공의 모습은 이 시대에 보기 드문 마초 드라마가 우리 곁으로 박력 넘치게 뛰어들었음을 상징한다. <감격시대>는 이른바 남자들의 순정 만화인 것이다.
순정 만화에 로맨스도 빠질 수는 없다. 애국과 사나이의 길 등 특유의 허세(김성모 화백의 작품에 비하면 정도가 약하지만)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린 시대. 영웅이 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운명과 격투가의 본능을 지닌 고독한 사내가 있다. 그는 외롭긴 하지만 다행히 주변에 여자는 여럿 있는데, 인생사 새옹지마라 덕분에 바람 잘 날이 없다. 남자로서 가족과 친구와 여자와 더 나아가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서 주먹을 말아 쥐고 해결해야 하는 게 남자의 삶이고 사랑에 가슴 아파하면서도 대의를 선택할 수 있는 게 남자의 길이다.
제작발표회에서 제작진은 “여러 마리 토끼를 잡고 싶다. 느와르물이라 해서 남성 드라마라기보다는 멋진 액션과 함께 의리, 멜로, 사랑 등 디테일한 감정들도 표출되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드라마를 만들겠다”며 로맨스의 디테일도 이 드라마의 강력한 한 축임을 밝혔다.
이 드라마의 등장에 박수를 치는 입장이긴 하지만 여기서는 제작진의 의도와 뜻을 달리한다. 단언컨대 <감격시대>는 남성 시청자들을 위한 종합선물세트가 될 것이다. 그 틀을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아저씨’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벗어나려는 순간 투박하지만 박력 있는 매력은 감퇴된다. 남자들에게 감퇴란 무서운 단어다. 정리해야 할 것이 여기서 말하는 ‘아저씨’란 단어의 뉘앙스다. 아가씨와 대비되는 세련미 떨어지는 옛것이나 촌스럽다는 의미가 아니다. 취향과 감성의 차이라는 말이다. 굳이 타겟 시청자의 범주를 확대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마치 목욕탕에 비치된 ‘미스쾌남’ 세트처럼 이 동네 특유의 정서가 있고, TV드라마 특유의 향수가 있다. 그래서 파쿠르를 기반으로 한 <본>시리즈나 매년 업데이트되는 견자단의 무술을 접한 사람들이 찾아보기엔 화려하다는 액션 연출과 스펙터클이 다소 올드해보일 수도 있다. 사실 <추노>처럼 새로운 영상미를 발견하는 놀라움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24부작 <감격시대>에는 수많은 등장인물이 나온다.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부터 <심장이 뛴다>의 조동혁, <바람>의 ‘멋진놈’ 지승현, 탁구로 유명해진 조달환에다 짧은 수명으로 유명한 김갑수, 개성파 연기자들인 김뢰하, 박철민, 액션에 일가견 있는 최재성, 정호빈, 유태웅, 악역에 능한 손병호, 김성오 등등 낯익은 얼굴들을 여기저기서 만나는 즐거움이 있다. 드라마는 짧은 시간에 각자 삶의 이유와 지향이 분명한 패거리를 중심으로 다양한 등장인물에 개성과 욕망을 입히고 굵직한 스토리를 꽤나 빠른 호흡으로 엮어간다. <감격시대>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등장인물의 매력이 대결을 하듯 팽팽하게 부딪히지만 산만하지 않고, 이야기에 몰입하는 데 끌리게 한다.
KBS는 <감격시대>에 150억을 투자해 로케 촬영을 하고, 특별기획 드라마라는 칭호를 붙였다. 이제 2회밖에 방영되지 않았지만 스펙터클한 영상과 화려한 액션 장면이 끝내준다는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등장에 흥분하면서도 짚고 넘어갈 것은 짚어야 한다. 이 드라마는 앞서 언급했듯이 미학적으로나 한국 드라마 사의 한 장면을 전환시킬 부분은 아직 보여주지 못했다. 배우들도 연기를 논할 정도를 보여준 새로운 모습이나 인상을 남긴 인물은 아역을 맡은 곽동연 외에 없다. 다들 아직 익숙한 그 모습 그대로였다. 이들에게 가장 비견되는 레퍼런스는 10여 년 전 드라마 <야인시대>다.
그래서 제작진도, 시청자도, 언론도 아저씨 정서를 기준 값으로 삼고 시작하지 않으면 <감격시대>에 관한 대화는 성립되지 낳는다. 원래 낭만이란 단어와 주먹이란 단어가 함께하면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유치함 같은 게 있다. 그리고 그 어쩔 수 없는 게 누군가에게는 무구하게 먹혀온 셀링 포인트인 것이다. 어쨌든 그 셀링 포인트를 붙잡는 건 남자다운 결단이었다. 방송 콘텐츠들이 전반적으로 여성취향에 맞게 흘러가는 이때 150억이라는 거액을 투자해 아저씨들을 위한 드라마를, 그것도 이 험난한 편성표 속에서 내놓고 로맨틱코미디와 전면대결을 펼치는 KBS 드라마국의 남자다움에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칼럼니스트 김교석 mcwivern@naver.com
[사진=KBS, MBC,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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