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계상의 유괴 이야기, 왜 이리 짠하고 따뜻할까(‘유괴의 날’)

‘유괴의 날’, 윤계상과 유나의 기막힌 반전 버디 스릴러

2023-09-15     정덕현 칼럼니스트

[엔터미디어=정덕현] 김명준(윤계상)은 과연 최로희(유나)를 유괴한 걸까 아니면 구해준 걸까. 지니TV ENA 수목드라마 <유괴의 날>이 그리는 사건은 어딘가 숨겨진 밑그림을 예상케 한다. 딸 희애의 병원비를 구하기 위해 뭐든지 하려는 딸바보 명준. 그에게 갑자기 나타난 전처 서혜은(김신록)이 희애의 병원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로희의 유괴를 제안한다. 마음이 여리고 착해 누굴 유괴할 위인이 못되는 명준은 할 수 없이 그 집 앞에 갔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로희가 차 앞에서 푹 쓰러지는 걸 발견하고 그를 태워 집으로 데려온다.

아이를 자기 집으로 데려온 건 분명 유괴라 부를 수 있지만, 깨어난 로희가 기억을 잃었다며 나는 누구냐고 묻기 시작하자 이 상황은 반전된다. 어딘가 어설프고 마음 약한 유괴범 명준 앞에서 깨어난 로희는 아이 같지 않은 비상한 두뇌로 명준을 쥐락펴락한다. 딸바보 명준은 얼떨결에 로희의 이름을 희애라고 하고 그가 자신의 딸이라고 거짓말을 하게 되고, 이를 의심하긴 하지만 어딘지 따뜻한 명준을 로희는 조금씩 의지하게 된다.

<유괴의 날>이 그리는 유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범죄 스릴러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명준과 로희는 분명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지만, 기억을 잃은 로희는 의심스럽지만 명준이 아빠이자 보호자라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이들은 아버지와 딸 관계가 된다. 게다가 이 관계는 어딘지 어리숙한 명준과 비상한 머리로 명준을 압도하는 로희는 어른과 아이라는 관계 또한 뒤집어 놓았다. 상황 판단에 있어서 로희가 더 어른 같고 명준은 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주니 말이다.

이렇게 뒤집어진 관계 속에서 명준과 로희가 점점 유대관계를 갖게 되는 상황이 <유괴의 날>이 진짜 그리려는 세계다. 딸바보 명준은 병실에 누워 있는 딸 희애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로희라는 아이를 통해서도 드러낸다. 희애가 그렸을 아버지와 딸의 그림을 보고 로희가 명준에게 아빠냐고 물었을 때 명준이 얼떨결에 그렇다고 말한 건 우연이 아니다. 그의 마음 한 구석에 로희와 희애가 겹쳐지는 지점이 있었을 테니.

또 로희가 의심스럽지만 명준을 점점 보호자로 아빠로 받아들이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기억을 잃었지만 로희는 명준의 차 앞으로 뛰어들기 전부터 무언가에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게다가 로희의 팔에 난 상처들은 그가 부모로부터 아동학대를 받아왔다는 걸 말해준다. 어찌 보면 로희는 유괴된 게 아니라 명준에 의해 구조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래서 따뜻한 마음으로 가난해도 로희를 챙겨주는 명준을 로희는 점점 보호자로 아빠로 받아들인다.

사건의 전말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아직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유괴의 날>이 그리는 유괴는 어딘지 짠하면서도 따뜻하다. 그건 명준과 로희가 모두 비정한 사회로부터 상처받고 밀려난 존재들이고, 그래서 세상은 그들을 유괴범과 유괴된 아이로 묶어 놓았지만 실상은 이 위협적인 세상에서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는 관계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유괴라는 범죄 스릴러를 소재로 가져왔지만, 알고 보면 벼랑 끝에 몰린 어른과 아이가 서로를 구원해가는 이야기. <유괴의 날>이라는 작품이 주는 따뜻함의 실체다. 그리고 그 따뜻함에는 비정한 세상에 대한 날선 비판의식이 깔려 있다는 점에서 마음 한 구석을 저릿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E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