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란’, 송중기와 홍사빈은 어떻게 아버지를 극복하는가
‘화란’이 느와르에 담아낸 신화적, 사회적 은유들
[엔터미디어=정덕현의 그래서 우리는] (내용 중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피 묻은 돌멩이가 더러운 흙탕물 위로 툭 던져진다. 그 돌멩이는 꼭 그걸 휘두른 연규(홍사빈) 자신을 닮았다. 그저 운동장 한 귀퉁이에 놓여 거기 있는지도 모른 채 지나쳤을 돌멩이. 하지만 이복 여동생 하얀(김형서)을 지키려 연규의 손에 들려진 채 누군가의 머리를 내리 친 그 돌멩이에는 피가 묻었다. 그 피는 이제 더러운 흙탕물 속에 던져진 연규의 몸에도 비린내를 풀풀 풍기며 묻고 흐를 참이다. 김창훈 감독의 느와르 영화 <화란>은 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한 장면 안에 앞으로 연규와 조직의 중간보스 치건(송중기)이 그려나갈 흙탕물 속 피비린내 가득한 세계를 압축적으로 담아낸다.
사실 서사만 놓고 보면 <화란>의 이야기는 그리 특별하진 않다. 찢어지는 가난과 상습적인 의붓아버지의 폭력, 그 속에서도 배달 알바를 하며 돈을 모아 엄마랑 네덜란드(화란)에 가려는 연규가 조직의 중간보스 치건을 만나 벌어지는 핏빛 가득한 이야기다. 하지만 <화란>은 이 흔해 보이는 서사에, 앞서 언급했던 ‘피 묻은 돌멩이’같은 다양한 은유와 상징들을 연출적으로 심어 놓음으로써 다양한 해석의 즐거움을 주는 작품이다.
피 묻은 돌멩이부터 시작해, 스카페이스, 쥐고 때리는 자의 손에도 철철 피가 묻어나는 못 덩어리, 의붓아버지의 야구방망이, 치건의 송곳, 사시미칼에 토막 나는 생선, 맨손으로 들고 가시를 발라먹는 뜨거운 생선토막, 낚싯바늘에 꿰어 구해진 아이, 사거리 한 가운데 연료가 바닥나 멈춰버린 오토바이 등등... 서사 위에 얹어진 다양한 은유적 영상들이 가득하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은유는 이 느와르를 신화적으로 해석하게 만드는 중요한 모티브다.
“다들 아빠 같은 거 없이 사는 줄 알았어요 나는. 엄마도 맨날 그랬어요. 그 딴 거 있으나 없으나 똑같애.” 이 말처럼 연규는 아빠 같은 거 없이 살아간다. 의붓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돌변해 야구방망이를 들고 연규를 팬다. 배다른 이복 여동생이지만 그래도 지켜주기 위해 돌멩이로 일진의 얼굴을 때려 찢어놓는 연규지만, 그는 의붓아버지의 이유 없는 몽둥이에 맞아 쓰러지다 화초에 얼굴이 찢어진다.
그래서 얼굴에 남게 된 스카페이스는 그나마 화란에 가려던 희망을 품고 다니던 배달 알바마저 끊어 놓는다. 의붓아버지가 든 방망이와 연규가 든 돌멩이는 이처럼 은유하는 의미가 다르다. 그가 끝내 참지 못하고 그 방망이를 들지만 차마 의붓아버지를 향해 휘두르지 못하는 건 그런 차이 때문이다. 아빠 없는 세상, 아니 연규에게는 아빠 같은 건 없는 게 나은 세상이다.
아빠 같은 건 없는 게 나은 세상을 살아가는 건 치건도 마찬가지다. 어린 아이에게 저수지에서 물고기를 잡게 하고 자신은 술독에 빠져 지냈던 아버지. 그물에 발이 묶여 물속에서 죽었다 생각했을 때 그는 마침 낚시를 하던 조폭의 낚싯바늘에 귀가 꿰어져 끌려 나온다. 치건이 빠진 물속과 아들이 빠져 죽어가는 데도 찾지 않을 정도로 그의 아버지가 푹 빠져 있던 술독. 그건 마치 연규의 돌멩이와 그의 아버지가 든 방망이처럼 은유하는 바가 다르다.
연규와 치건이 각각의 폭력적인 아버지들과 마주한 상황은 이 느와르에 담겨진 ‘아이 살해’ 서사 모티브를 읽게 해준다. 서구에 ‘부친 살해’ 서사가 있다면 유교적 문화권에 살아온 중국과 우리에게는 ‘아이 살해’ 서사가 있다. 그리스신화의 제우스와 오이디푸스에서부터 <스타워즈>에까지 담겨진 서구의 부친 살해 서사는 아이가 아버지를 딛고 일어서야 어른이 된다는 성장 서사를 은유한다. 그리고 이 은유는 기존 낡은 체제에 대한 혁명의 서사를 말하기도 한다.
그 정반대에 이른바 ‘아기장수’ 설화로 대변되는 ‘아이 살해’ 서사가 있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난 아기를 보고는 장차 역적이 되어 집안을 망칠 것이라며 돌로 눌러 죽였다는 이 설화는 공고한 체제 유지를 위해 충과 효를 근간으로 내세웠던 유교적 사회의 산물이다. <화란>이 연규와 치건을 통해 그리는 세계는 그래서 이 공고한 체제 유지를 위해 아이를 무시로 희생시키는 아이 살해 서사의 현실을 재현한다.
어쩌다 조폭에 의해 죽을 위기에서 구해졌지만 치건은 이미 살해된 아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삶을 살게 된 것. 낚싯바늘에 꿰어진 찢어진 귀를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상흔으로 가진 채 조폭의 수족이 되어 살아간다. 그런 그가 역시 찢어진 얼굴의 상흔을 가진 채 나타난 연규를 보고는 남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건 거기 똑같이 ‘아버지의 폭력 혹은 부재’가 보이기 때문이다. 치건은 연규를 돕고, 자기 조직으로 데려와 키우면서 때론 부재한 아빠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형 역할을 하는데, 그건 연규를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피 묻은 돌멩이 같은 소년에게서 저수지에 빠져 허우적대다 죽어버린 아이를 본다.
갈 곳 없어 찾아온 연규에게 물고기의 목을 치고 내장을 발라내 끓여낸 매운탕으로 함께 밥을 먹는 치건은 그래서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밥을 먹이는 것처럼 보인다. 뜨거운 매운탕에 맨손으로 물고기 토막을 집어 가시를 발라내며 뜯어먹는 치건을 보며, 연규 또한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동질감을 느낀다. 그래서 그 역시 치건처럼 맨손으로 호호 불어가며 뜨거운 고기를 뜯어먹는다. 치건은 다른 조직원들과 달리 연규에게 ‘형님’이 아닌 ‘형’이라고 부르라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형제 같은 관계이면서 마치 서로의 거울 같은 관계가 되어간다.
치건의 말대로 그 동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글러먹었고 그래서 아이들은 무시로 버려지거나 폭력 앞에 피를 철철 흘리며 다닌다. 치건은 그런 연규를 자신처럼 보듬으면서 또 한 편으로는 지옥 같은 조직의 삶이 그들 같은 처지에는 딱 맞다고 생각한다. “여기가 집이야 너한테 딱 맞다고. 여기가.”
연규는 이 글러먹은 동네에서 벗어나 엄마와 함께 화란에 가고 싶어 하지만 그건 잠깐 인터넷 사진 속에나 있는 곳일 뿐, 그의 현실이 되진 못한다. 거길 왜 가고 싶어 하냐고 묻는 치건의 질문에 “누구나 똑같이 사는 나라”라고 연규는 말하지만, 치건의 말대로 그런 곳이 이 세상에 있기는 할까. 그래서 치건은 꿈같은 건 꾸지도 말라고 한다. 그저 누군가 시키면 질문하지 말고 해야 되는 것이다. “해야 되면 하는 거야 우린.”
그렇다면 이 지옥 같은 삶에서 연규와 치건에게 구원이란 있을까. 이들은 과연 각자의 아버지들이 만들어낸 무거운 그림자를 어떻게 극복할까. 해야 되면 하는 것이 이들의 존재가치인 삶에서 죽이라면 죽여야 하는 그 일을 연규에게 시키며 치건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차마 연규는 그러지 못한다. 뒤늦게 해야 될 일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누군가의 팔목이며 죽음이라는 걸 알게 된 연규는 그걸 내줘서라도 제자리로 돌려놓으려 하지만, 연규를 물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아이로 바로 보는 치건은 이를 용납하지 못한다.
치건이 애써 구해내려는 건 그래서 연규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이다. 그 때 물속에 빠졌을 때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았던 세상에서 이미 죽었던 그는 살아도 살아있는 삶이 아니었다. 그건 누군가의 손에 들려진 돌멩이었고, 누군가 내리치면 목을 내줘야 하는 생선이었으며, 누군가 맨손으로 뜯어먹으면 뜯겨야 하는 살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엔딩에 이르러 치건의 선택은 동시에 연규를 살리면서 그 때 물속에서 죽었던 자신을 되살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치건의 선택에 의해 아이 살해 모티브가 부친 살해 모티브로 바뀌는 이 장면은 그래서 신화적이다. 심지어 죽은 자가 되살아나는 부활의 서사까지 담겨 있으니 말이다. 이로써 치건은 연규를 구해 자신을 구원하고, 연규 역시 치건의 도움으로(부친 살해를 통해) 비로소 어른이 되어 어디론가 떠나간다.
흥미로운 건 이 신화적인 뉘앙스를 담은 서사가 또한 현 우리 사회가 가진 시스템의 단면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청년세대를 희생시켜 살아남으려는 기성세대들의 시스템과 그 시스템이 혁신되어야 미래가 있다는 목소리들의 부딪침이 그것이다. 이것은 <화란>이라는 느와르가 가진 만만찮은 문제의식을 보게 해주는 지점이다. 그저 흔한 느와르로 치부할 수 없는 영화다. 장면 하나하나를 곱씹을수록 깊은 맛의 여운이 느껴지는 작품이니.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영화 ‘화란’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