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간 5분 동안 꽉 붙들어 매는 ‘살인자o난감’의 예측불가 몰입감

살인자와 우린 과연 다른가... ‘살인자o난감’의 도발적인 질문

2024-02-12     정덕현 칼럼니스트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글에 스포일러가 일부 있습니다) 그저 평범하게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는 자취생 대학생 이탕(최우식). 그는 어느 날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죽은 자가 죽어 마땅한 희대의 살인마였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살인자o난감>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과연 그럼 이탕은 희대의 살인마를 처단한 영웅인가 아니면 그저 살인자일 뿐인가.

살인을 저지르고, 그걸 무마하기 위해 또 다시 살인을 저지르지만 우연과 필연이 겹쳐 죽은 자들이 죽어 마땅한 이들이라는 게 계속 드러나고 심지어 현장의 살인 증거들조차 모두 사라지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면서 이탕은 기묘한 입장에 서게 된다. 그건 살인자가 된 것에 대한 죄책감, 두려움과 더불어 그것이 영웅적 행위였다는 합리화가 겹쳐져 만들어진다.

하지만 살인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저지른 희대의 살인마들은 과연 특정 부류에 속하는 이들일까. 그저 평범했던 대학생이었던 이탕이 그러하듯이 살인자는 누구나 될 수 있다. 그건 이 미결 사건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형사 장난감(손석구)의 생각이다. 늘 입에 껌을 물고 다니고 풍선을 부는 그는 ‘그냥 껌으로도 풍선을 불 수 있듯이’ 살인자와 보통 사람에는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시각은 이 드라마가 장난감 형사나 전직 형사였지만 희대의 살인마가 된 송촌(이희준)을 통해 보여주듯이, 형사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관점이다. 드라마는 장난감 형사의 사수인 박충진(현봉식)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형사로 살아간다는 게 요래, 교도소 담장을 걷는 거 같다 하거든? 요 균형을 잡고 요래 계속 가면 괜찮은데 삐끗하는 순간 운이 좋으면 민간인이 되는 거고 반대로 반대쪽으로 떨어지면은 감방에 가는 거지. 그리고 감방 가기 싫다 하면 도망을 가는 거고. 사람사는 게 다 거기서 거 아니겠나.”

박충진의 말처럼 이 드라마 속 메인 인물인 이탕, 장난감 그리고 송촌은 겉으로는 도주하는 살인자와 그를 추적하는 형사로 나뉘지만 그 정체성의 경계가 애매한 이들이다. 이탕은 평범한 대학생이지만 어쩌다 살인자가 되었고, 송촌 또한 한 때는 형사였지만 정의감이 지나쳐 광기에 빠지면서 살인마가 되었다. 장난감은 어떤가. 뒤에 가서 밝혀질 진실이지만 그와 송촌 사이에 얽혀 있는 아버지의 문제는 누가 진짜 선이고 악인지 알 수 없는 상황들을 그에게 안긴다.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 아니겠나”라는 대사 속에 담겨 있는 것처럼, 드라마는 드러난 것만으로는 그 실체를 알 수 없다는 이야기를 건넨다. 겉으로 보기에 피해자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가해자일 수 있고, 또 정반대가 될 수도 있다. 평범한 이가 살인자가 될 수 있고, 정의감에 충만했던 형사가 광기에 빠져 희대의 살인마가 될 수 있다. 법이 해결하지 않는 정의를 구현하려 ‘영웅 놀이’를 하려했던 노빈(김요한)이라는 인물 역시 마찬가지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균형을 잃은 그는 자신의 행위를 정의라고 말하지만, 장난감 형사에게 그건 그저 살인에 불과하다.

그래서 <살인자o난감>의 인물들은 위태로워 보인다. 그들은 모두 저 교도소 담장 위에 서 있는 형사들처럼 경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훈련을 받아 훌륭한 안내견이 될 수 있는 개가 그렇지 못해 누군가를 물어뜯는 맹견이 될 수도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드라마는 언제든 폭력성이 드러날 수 있는 이들을 어떻게 사회가 감당할 것인가에 대한 화두도 놓치지 않는다. 그건 장난감 형사가 아버지와 반려견 렉스를 두고 갖는 안락사에 대한 고민을 통해서다. 그의 아버지는 오랜 세월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연명치료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고, 렉스는 수사에 단서가 될 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장난감 형사가 집으로 데려온 살인자가 키우던 개다.

아버지가 장난감 형사를 짓누르는 과거의 유산이라면 렉스는 마치 우리 안에 언제든 잠재되어 있을 수 있는 폭력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할 것인가. 안락사를 통해 그것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 방법일까. 하지만 그것 역시 또 다른 절차에 의한 폭력일 수 있지 않을까. 안락사 선택의 끝까지 가던 장난감 형사가 끝내 그 선택을 되돌리는 건 그래서 이 작품이 말하고 있는 ‘일상의 폭력성’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그건 우리 안에 폭력성이 언제나 잠재되어 있다는 걸 인식하고 그걸 스스로 통제하고 균형을 잃지 않으려 늘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맹견을 훈련시켜 훌륭한 안내견이 될 수 있게 하듯이.

냉소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마치 우연과 필연의 장난감 같은 존재일 수 있다. 휩쓸리는대로 뜯어졌다 또 붙여졌다 하는 그런 장난감. 하지만 장난감 형사가 이름과는 역설적으로 “상대방에 원하는대로 반응하지 않으면 휘둘리지도 않는다”고 한 말에 해법이 있다. 장난감 형사는 폭력적인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가 원하는대로 반응하지 않음으로서 그 폭력을 끝내버린 경험으로 그런 깨달음을 갖게 된다. 우린 마치 장난감처럼 위태롭고 위험천만하다. 그건 그 누구도 다르지 않다. 때론 가해자가 될 수도 있고 때론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중심을 잡고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고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이러한 어디로든 튈 수 있는 위태로운 인간의 모습을 <살인자o난감>은 한치 앞도 예측하기 어려운 전개를 통해 끌고 가는 드라마다. 그저 흔한 권선징악의 스토리들이 줬던 지루함과 식상함이 과연 저게 현실인가 하는 의구심에 나오는 것이라면, 이 드라마는 그 평이한 상투성을 끊임없이 부숴뜨림으로써 시선을 돌릴 수 없게 만든다. 8부작이지만 예상을 깨는 스토리와 뒤로 가면서 맞춰지는 조각들이 7시간 5분의 러닝타임 내내 강력한 몰입감과 카타르시스를 주는 작품이다. 특히 일상에서부터 뻗어나가는 흥미진진한 사건 전개를 통해 장르적 재미를 담보하면서도 일상과 맞닿아 있는 폭력성의 문제를 깊이 들여다본 점은 이 작품이 거둔 중요한 성취가 아닐까 싶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