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진짜 귀주대첩으로 가나, ‘고려거란전쟁’의 못내 아쉬운 지연술

‘고려거란전쟁’, 어째서 무리하게 최질의 난을 각색했을까

2024-02-26     정덕현 칼럼니스트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강감찬(최수종) 장군의 귀주대첩은 도대체 언제 시작되는 걸까. KBS 대하사극 <고려 거란 전쟁> 시청자들은 몇 주째 ‘김훈-최질의 난’으로 채워지고 있는 것이 못내 답답하다. 물론 ‘김훈-최질의 난’은 실제 역사에도 있는 사건이다. 전란으로 곤궁해진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무장들에게 지급됐던 영업전을 회수해 관리들의 녹봉을 충당하려 함으로써 무신들의 쿠데타를 일어난 사건이다.

하지만 이 난이 벌어지고 결국 무신 통치가 되게 되는 그 상황을 <고려 거란 전쟁>은 박진(이재용)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배후 조종한 사건으로 각색했다. 전쟁에 나갔다 두 아들을 잃은 후 고려 황실에 원한을 품고 복수를 꿈꾸게 된 박진은 2차 고려거란전쟁이 지난 후 개경으로 올라와 호시탐탐 현종(김동준)을 위협하는 음모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인물이다.

그런 지방 호족이 있을 법한 설정이지만, 그가 김훈(류성현)과 최질(주석태)을 뒤에서 획책해 반란을 일으키고 나아가 원정황후(이시아)마저 세치 혀로 겁박해 반란에 가담하게 만드는 이야기는 개연성이 떨어진다. 사극으로서 어느 정도의 각색은 허용될 수 있는 일이지만, 현종을 그 누구보다 아끼는 황후가, 현종의 안위를 위해 반란군을 결과적으로 돕는 일에 가담한다는 건 납득하기가 어렵다.

그 무리한 개연성을 만들기 위해 원성(하승리)에 대한 원정왕후의 질투심을 부각시키는데, 이건 해석이라기보다는 이 실존인물에 대한 왜곡이 아닐 수 없다. 실제 역사에서 원정왕후는 현종이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정비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드라마는 박진이라는 가상인물에 의해 휘둘리는 어리석고도 질투심에 눈 먼 인물로 원정왕후를 그리고 있다.

KBS 대하사극은 ‘정통사극’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역사 그 자체를 사실대로만 기록하는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되 빈 구석들을 상상력과 허구로 채우는 사극으로서의 여지를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진 같은 가성의 허구적 인물을 세우는 건 충분히 허용될 수 있다. 하지만 ‘김훈-최질의 난’의 근본적인 문제가 영업전 회수가 아니라 그건 명목일 뿐 실제로는 박진 같은 인물의 획책 때문이었다고 그린다거나, 엄연한 실제 역사적 인물인 원정왕후를 현종을 가로막는 인물로 그리는 건 과한 일이 아닐까.

시청자들이 답답해하는 건, 애초 <고려 거란 전쟁>이 서두 부분에 보여줬던 ‘전쟁’의 양상이 아니라 어쩌다 ‘김훈-최질의 난’ 같은 쿠데타와 그 이면에서 음모를 꾸미는 박진 같은 빌런의 서사를 상당 부분 길게 그리게 됐는가 하는 점이다. 첫 시작부터 <고려 거란 전쟁>이 보여준 건 다름 아닌 강감찬 장군이 검차를 이끌고 거란군과 맞서는 귀주대첩이었다. 그리고 흥화진 전투나 곽주 탈환 작전 같은 전투들이 이어졌지만 거란군이 물러나며 2차 전쟁이 소강상태로 이어진 후에는 꽤 오래도록 궁중암투나 정쟁, 쿠데타의 이야기로 채워졌다.

사실 시청자들이 원한 건 계속 이어지는 전쟁의 서사였을 테다. 하지만 <고려 거란 전쟁>이 그걸 계속 이어갈 수 없었던 데는 아무래도 제작비 이슈가 가장 크지 않았을까 싶다. 총 32부작인 <고려 거란 전쟁>은 16회에 거란군을 패퇴시키며 양규(지승현)와 김숙흥(주연우)이 장렬히 전사한 이후 현재인 28회까지 무려 12회를 고려 안에서 벌어지는 내홍으로 채웠다. 전쟁 신을 계속 채워넣어 거란과의 전쟁에 집중하기에는 제작비가 턱없이 부족했을 터다. 실제로 쿠데타 등에 등장하는 장면들 속에서도 너무나 적은 병사들로 연출되는 장면들이 적지 않았다.

과거 KBS 대하사극은 심지어 200부작(태조 왕건), 134부작(대조영) 같은 1년을 훌쩍 넘기는 동안 방영되기도 했다. 그만큼 스펙터클보다는 정치극의 양상들을 더 많이 그려냈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또 당대의 시청자들은 다소 조악한 전투신도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과연 지금도 먹힐 수 있을까.

<고려 거란 전쟁>이 초반 호평을 받았던 건 그 흔한 정치극의 양상들보다 ‘전쟁의 양상’을 스펙터클한 전쟁 신들과 함께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중반을 지나면서 <고려 거란 전쟁>은 다시 과거 대하사극의 틀로 돌아간 듯한 퇴행을 보여줬다. 시청자들이 실망감을 표한 이유다. 제작비가 여의치 않다면 애초 ‘전쟁’의 서사를 굳이 담으려 한 지점이 무리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32부가 아닌 보다 짧은 회차로 전쟁 중심의 서사로만 채우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어쨌든 길게 돌아 4회 남은 <고려 거란 전쟁>이 귀주대첩을 통해 기다려온 시청자들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거기까지 오는 과정의 아쉬움은 여전히 남지만.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