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자 허를 찌르는 기발한 작전이 벤치에서 나와야 하는 까닭(‘찐팬구역’)
‘찐팬구역’, 스케일 키운 입중계의 빛과 그림자
[엔터미디어=김교석의 어쩌다 네가] 1990년대에 프로야구를 배우고, 미국 프로스포츠를 AFKN과 위성방송을 통해 접해서일까. 여전히 방송에서 한 팀만을 위한 목소리를 내는 현실이 새롭고 낯설다. 프로스포츠가 발달한 미국이나 유럽은 지역 방송이 활성화되어 있고, 지역 연고주의가 훨씬 강한 문화가 스포츠 중계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지만, 우리의 경우 기계적 중립을 지향하는 언론관과 중앙집중화된 방송 환경의 영향이 적잖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영국 다큐멘터리 ‘죽어도 선덜랜드’처럼 특정 팀 팬을 코어 로 삼는 예능 기획이 새롭게 느껴진다. ENA와 채널십오야에서 공개하는 신규 예능 ‘찐팬구역’은 만년 하위팀인 한화 이글스를 ‘그럼에도’ 응원하는 콘셉트로 기획된, 선수가 아닌 팬을 주인공으로 하는 국내 최초의 스포츠예능이다. KBO와 생태계를 공유하며 확장하고 있는 JTBC ‘최강야구’의 세계관을 참고하고, 일정을 나름대로 공유하려는 선순환의 노림수도 흥미롭다. 일주일 중 유일하게 프로야구 경기가 없는 월요일에 방송하는데, 차태현의 말처럼 저녁에 ‘찐팬구역’을 보고 늦은 밤 ‘최강야구’를 즐기면 된다. 또한, 폐지 공약이 걸려 있는 ‘최강야구’와 마찬가지로 ‘찐팬구역’도 한화 이글스가 5위 안에 들지 않으면 자동 폐지된다. 한화의 시즌 성적과 연동된 운명 공동체다.
야구는 흐름의 스포츠라고도 하는데, ‘찐팬구역’은 시작 전부터 둘러싼 흐름이 상당히 좋았다. 한국 프로야구는 얼마 전까지 이런저런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예능 ‘최강야구’가 일으킨 붐과 이정후, 김하성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면서 다시금 황금기를 맞고 있다. 한화 이글스도 모처럼 비상했다. 만년 하위팀에 무한한 애정을 보내는 한화 팬들의 애환과 순정을 골자로 기획한 흔적이 1화에서 고스란히 남아 있긴 하지만, 류현진의 전격 합류 등 한화는 시즌 초반 유례없는 연승을 거듭하며 모처럼 한밭발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예능 시청자 입장에서 관심이 가는 뉴스도 있다. 급 폐지되어 아쉬움을 샀던 KBS ‘홍김동전’제작진이 퇴사 후 만든 첫 프로젝트인데 그 파트너가 무려 나영석의 에그이즈커밍이다. ‘찐팬구역’은 외부 제작진이 기획한 에그이즈커밍의 첫 프로젝트로서, 채널십오야를 통해 동시 공개 및 홍보까지 적극 지원사격하고 있다. 그래서 차태현, 조세호 등 그간 나영석 사단과 무관한 예능 선수들이 나영석 PD와 함께 등장하는 새로운 그림도 볼 수 있다.
지난 8일 드디어 시즌 개막전에 촬영한 대망의 1화가 공개됐다. 뚜껑을 열고 보니 웹콘텐츠에서는 활발한 장르 중 하나인 ‘BJ 입중계’를 게스트, MC, 특파원이 있는 스튜디오 예능으로 풀어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차태현, 인교진, 신소율 등이 응원하고 조세호가 나름의 토크를 이어가는 ‘찐팬구역’을 보면서 채널십오야의 ‘나불나불’이 아니라 이경규가 진행한 올드예능 ‘보고 싶다 친구야’가 떠오른다. 식당, 술집 등 캐주얼한 장소에서 친구들끼리 격의 없는 분위기를 쇼버라이어티에 담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처럼 ‘찐팬구역’은 인터넷 커뮤니티 문화를 받아들이고, 유튜브 채널에서 오픈하는 등 기존 TV문법에서 벗어난 듯 보이지만, 방구석에서, 혹은 컴퓨터 앞에서 침 튀기고 비속어를 남발하며 감정을 표출하고 포효하는 ‘입중계’에 예능의 형식을 입히고 스케일을 키웠다. 도파민 도가니인 입중계를 방송에 맞게 정갈하게 정리하고 다듬고 큰 그릇에 담아내 점잖다. 문제는 그 방식의 정형성이다. 웹 콘텐츠의 정서와 재미를 예능화하는 데 있어 진행, 편집, 메시지, 감동 코드 등등 쇼버라이어티의 방정식을 그대로 가져오다보니 결과를 이미 아는 경기를 다시 보는 듯한 시시한 기분이 든다.
마케팅으로 내세우는 ‘홍김동전’도 오늘날 사라져가는 리얼버라이어티의 향수가 짙은 프로그램이었다. ‘찐팬구역’은 그보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쇼버라이어티의 코드를 내세운다. 그래서 레트로 무드의 예능을 좋아하는 시청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고, 또 랜선 너머, 응원석 옆자리에 있던 누군가를 하나로 엮는 연대의 시선이 야구 사랑의 공감대로 나아갈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자조적으로 유희하는 한화의 응원 문화를 내세우는 것 이외에 형식과 스토리텔링의 측면에서 재미라 느낄 결정구가 약하게 느껴진다.
40여 년 동안 국민스포츠로 인기를 누린 프로야구는 WBC의 영광으로 인기가 증폭되고, 인터넷 커뮤니티, SNS 시대와 조응하며 우리나라만의 특별한 문화이자 일상의 한 부분이 됐다. 그 결과 프로야구는 지역, 세대, 성별을 불문하고 모두가 어울려 함께 즐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중문화이자 엔터테인먼트다. 그러니 야구에 관련된 콘텐츠들이 파생되고, 함께 즐길 수 있는 거리가 늘어나는 건 행복한 일이다.
문제는 웹콘텐츠를 TV예능으로 전환한다는 발상 자체를 승부수로 삼기엔 약하다. 심지어 예능으로 양성화하면서 기존 입중계의 장점은 밋밋해졌고, 스케일업을 한 볼거리는 아직 제구가 되지 않고 있다. 쉽게 말해 입중계를 넘어선 예능이 되기 위해선 다음 주를 기대하게 만들 스토리가 필요하다. 입중계를 예능화하는 데 있어 허를 찌르는 기발한 전략이 벤치에서 나오길 기대해본다.
칼럼니스트 김교석 mcwivern@naver.com
[사진=E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