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가 꿈꾸는 새로운 남성 판타지 이준혁(‘나의 완벽한 비서’)

‘나의 완벽한 비서’, 살림도 비서일도 잘하는 이 남자의 정체

2025-01-06     정덕현 칼럼니스트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어디 괜찮은 비서 없어? 우리쪽 업무 이해도 높은 사람으로. 인사 쪽 경험 있으면 베스트지. 어, 정리정돈 잘하고 깔끔한 사람... 어 일정 관리 중요하고, 어, 기억력에 센스까지 타고난 사람이면 퍼펙트. 아 그 제일 중요한 거 손 많이 가는 우리 강대표 사고 치는 거 케어할 사람. 그런 사람이 인사전문가인 사람은 드물겠지? 일단 끊어 봐. 찾았다.”

SBS 금토드라마 <나의 완벽한 비서>에서 피플즈의 이사 서미애(이상희)는 친구이자 대표인 강지윤(한지민)의 비서가 갖춰야 할 조건들에 대해 전화로 이야기한다. 마침 남편의 후배인 유은호(이준혁)의 집에 초대받아 간 서미애는 자신이 말하는 그 조건들에 하나하나 부합하는 상황들을 그 집안 곳곳에서 발견한다.

완벽하고 깔끔하게 정리정돈되어 있는 집안 구석구석은 물론이고 아이의 일정들을 꼼꼼하게 적어 붙여놓은 일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또 아이가 주스를 들고 가다 발이 걸려 넘어질 때 당황하지 않고 아이를 안전하게 받아낸 후, 흘린 주스를 닦아내는 모습에 서미애는 눈을 반짝인다. 펼쳐 본 유은호의 이력서를 보니 마침 인사팀에서 일했던 경력까지 갖췄다. 서미애가 유은호에게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워 강지윤의 비서로 채용한 이유다.

이 장면은 물론 코미디로 처리되어 있지만, 싱글 파파로서 딸의 육아와 가사 같은 살림을 완벽하게 하고 있는 유은호의 집에서의 역할과 능력이, 앞으로 그가 새로운 직장인 피플즈에서 일하게 될 강지윤의 비서로서의 역할과 능력에 딱 맞는 것으로 그려진 대목은 흥미롭다. 여기에는 흔히들 육아 때문에 경력단절을 경험하는 여성들의 판타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육아와 가사 일을 경력으로 여기지 않는 사회적 풍토 때문에 여성들은 이 기간이 ‘경력단절’이 되고 그래서 취업 자체가 어려워지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유은호는 다르다. 그는 오히려 싱글 파파로서 해온 육아와 가사 일이 그가 앞으로 할 비서라는 역할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경력이라는 걸 서미애라는 인물을 통해 인정받는다. 여성들이 꿈꾸는 판타지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나의 완벽한 비서>에 등장하는 모든 회사가 서미애 같은 가치관을 가진 건 아니다. 유은호가 다니다 그만두게 됐던 회사는 이와는 정반대다. 어찌 보면 실제 현실을 보여주는 이 회사를 유은호가 그만두게 된 건 중요한 프로젝트를 앞두고 육아휴직을 썼기 때문이다. 딸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유은호는 회사 일보다 딸의 건강과 행복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상사는 복직한 유은호를 끝내 모함해 밀어낸다. 이것이 지금의 육아와 가사를 바라보는 회사의 현실적인 모습일 게다.

그래서 유은호는 지금까지의 멜로 드라마들과는 다른 남성상의 판타지를 꺼내놓는 인물이다. 비서라고 하면 주로 여성을 떠올리던 그 고정관념을 깨고 들어오는 인물이고, 가사와 육아의 가치가 실제 일에서도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인물이다. 또 능동적으로 사회생활을 해나가고 싶어하는 여성들에게는 이처럼 집안일에도 자상한 남성이 판타지가 아닐 수 없다. 유은호의 육아동지이자 이웃인 정수현(김윤혜)가 유은호를 애정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건 그래서다.

그런데 <나의 완벽한 비서>는 이 같은 남녀의 역할을 뒤집어 놓는 것에서 더 나아가 직장 내 위계 구도를 수평적으로 그려내는 판타지까지 펼쳐낼 작정이다. 강지윤과 유은호는 직장 내 대표와 비서의 위계 구도를 갖고 있지만, 차츰 유은호의 마치 내조(?) 같은 자상한 돌봄(?)을 통해 강지윤은 본인이 갖고 있는 상처를 치유하고 극복해가는 과정을 보일 것으로 보인다(그게 아니라면 왜 멜로 장르를 표방했겠는가!). 이렇게 강지윤과 유은호는 위계 구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성장시키고 구원하는 상보적인 관계로 바뀌어 갈 것이다.

돈과 성공 같은 가치로 남성의 판타지가 그려지던 시절은 이제 지나간 듯 싶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역할의 틀에 갇혀 있지 않고 인간적인 관계라는 새로운 가치를 가진 새로운 남성상이 우리 시대가 꿈꾸는 판타지가 되고 있다. 이준혁의 반듯한 이미지와 연기가 공고하게 채워주는 이 새로운 남성상에 시청자들도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게다. 철벽을 세우던 강지윤이라는 인물이 조금씩 마음을 열고 이 인물에 빠져드는 것처럼.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gmail.com

[사진=S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