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수의 똘끼, 기자 나오는 드라마는 망한다는 속설 무너트리다(‘트리거’)

김혜수의 똘끼, 정성일의 분노, 주종혁의 짠내가 합쳐지니(‘트리거’)

2025-01-23     정덕현 칼럼니스트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여긴 드라마국처럼 큰 돈은 못벌어도 PPL은 받지 않는 지조와 자존심이 있고 그리하여 지난 10년 간 시청자들이 가장 신뢰하는 프로그램 1위, 대한민국 탐사 보도 프로 중 단연 시청률 1위의 KNS 시교국 간판 트리거예요.”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트리거>에서 오소룡(김혜수) 팀장은 자신들이 만드는 ‘트리거’라는 탐사보도 프로그램에 대해 그렇게 설명한다.

돈보다 사명감이 더 앞서는 이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오소룡은 물불 가리지 않는 인물이다. 사람들을 붙잡아 놓고 마약 재배를 시키는 사이비 종교를 고발하기 위해 패러글라이딩을 타고 급습할 정도이고, 이 팀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구형태(신정근) 사장의 압력 앞에서도 사건 보도에 주저하지 않는다. 남자친구가 자신을 불법적으로 찍은 사진이 공개되어 기자들의 무례한 질문세례가 쏟아지자, “제가 피의자입니까?”라며 피해자인 자신에게 쏟아지는 질문이 잘못됐다는 걸 정면으로 반박하는 그런 인물. 한 마디로 진실 보도가 가야할 길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는 똘끼로 똘똘 뭉친 인물이다.

돈키호테 같은 오소룡의 이 대책 없어 보이지만 오로지 진실만을 향해 들이대는 카메라는 그러나 시청자들에게는 강력한 판타지로 다가온다. 사람을 노예처럼 부리는 사이비 종교집단이나 촉법소년임을 앞세워 잔혹한 살인을 저지르고도 반성 하나 없는 범죄자와 그를 그렇게 만든 부모, 딸을 심지어 엄마 앞에서 상습적으로 성폭행해온 천인공노할 범죄자... 이런 극악한 범죄들이 실제로도 벌어지는 현실이 아닌가. 돈 때문에 외압 때문에 진실 보도를 할 수 없는 언론들마저 존재하는 현실 앞에서 오소룡의 똘끼는 그래서 이 모든 답답함을 뚫어주는 시원한 사이다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트리거>는 오소룡 같은 똘끼 가득한 팀장 한 명의 돈키호테적인 영웅 서사가 아니라, 예사롭지 않은 팀원들과의 기막한 시너지를 그려낸다. 드라마팀에서 갑자기 트리거팀으로 오게 된 한도(정성일)와 그 팀에서 3년 간 일했지만 비정규직이라 자기 프로그램을 해보지 못하고 보조에 머물러 있는 강기호(주종혁)가 그들이다. 자신이 트리거팀에 오게 된 사실에 황당해하며 은근히 이 팀을 낮게 바라보는 한도는 그래서 오소룡에게도 대드는 싸가지 없는 중고신입이고, 능력은 갖췄지만 비정규직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늘 배제되어온 강기호는 짠내 나는 젊은 기자다.

한도는 하기 싫지만 등 떠밀려 트리거팀의 일을 하게 되는 인물이고, 강기호는 정반대로 하고 싶지만 아무도 기회를 주지 않아 일을 못했던 인물이다. 그러니 두 사람 사이의 환장의 케미가 생겨난다. 공통의 목표인 방송을 위해서는 함께 뛰지만, 시종일관 티격태격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정이 들고 성장한다. 한도는 길고양이를 잔혹하게 죽이고 결국 아이마저 납치해 죽인 사이코패스 소년범죄자 앞에서 진실 보도를 하고픈 강력한 욕망을 갖게 된다. 그 힘은 분노다.

뻔뻔한 소년범죄자에게 카메라를 숨긴 채 들어가 자랑하듯 자백하는 영상을 찍은 한도는 그에게 일침을 가한다. “넌 그냥 엔드 게임 루저야. 가망이 없다고. 촉법? 그건 법에서나 통하는 거고. 이 바닥엔 그딴 거 없어. 인권? 그런 건 더 없어. 아 딱 하나. 영고짤. 들어 봤냐? 방송국 놈들은 시청률만 올라가지? 누구 인생이 똥이 되든 된장이 되든 신경도 안 써. 낱낱이 찍어서 싹 다 내보내.... 야 엔드 게임 루저 잘 들어. 영고짤이란 ‘카메라로 네 죄를 박제해서 이 시간부로 내가 널 영원히 고통받는 짤로 박제한다.’ 이런 뜻.” 어찌 보면 오소룡보다 더 한 똘끼의 중고 신입이다.

이들 사이에 들어 있는 강기호는 열정을 넘치지만 짠내 또한 가득한 현실적인 청년 기자다. 오소룡과 한도와는 사뭇 색깔이 다르다. 오소룡과 한도가 진지함과 통쾌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면, 강기호는 짠내 가득하지만 어딘가 웃음이 터져나오는 가벼움을 선서하는 캐릭터다. 오소룡과 한도가 저 세상 텐션을 보여주는 판타지적 돈키호테들이라면, 이들이 허공으로 붕붕 떠오르는 걸 매번 잡아끌어 현실에 발붙이게 하는 인물이랄까. 한도와 더불어 그 역시 자신의 아이템을 맡으면서 성장해갈 인물이지만.

이처럼 <트리거>는 오소룡과 한도 그리고 강기호라는 세 사람의 서로 다른 결이 기막힌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드라마다. 오소룡이 드라마의 중심을 잡아주는 주제의식에 가까운 인물이라면, 한도는 그걸 알아가고 도와주며 성장하는 인물이고, 강기호는 이들의 판타지에 현실감을 부여하며 무거운 극의 분위기에 웃을 수 있는 숨통을 티워주는 인물이다. 물론 이들과 더불어 현실감이 느껴지는 무심하면서도 다정한 CP 박대용(이해영)이나 노련함이 묻어나는 베테랑 작가 홍나희(장혜진)도 빼놓을 수 없다.

매력적인 캐릭터의 앙상블에 이걸 실현해내는 연기자들의 시너지가 더해지면서 <트리거>가 꺼내놓는 현실 판타지는 강력해졌다. 거의 엽기적인 수준의 충격적인 사건 자체가 불러일으키는 분노가 실제 현실 어딘가에서 봤던 사건들을 떠올리게 하며 시선을 잡아끈다면, 그 사건을 끝내 보도해내는 판타지가 이 팀의 완벽한 시너지로 펼쳐진다. 흔히들 기자 나오는 드라마는 망한다는 속설이 있지만, <트리거>는 그것이 그저 속설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준다. 좋은 캐릭터와 연기, 스토리가 있다면 속설 따위는 훌쩍 뛰어넘을 수 있다는 걸.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gmail.com

[사진=디즈니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