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억 배상금을 세금으로? ‘꼬꼬무’ 아니었으면 쭉 모르고 살았으리라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헛소리를 어찌할꼬(‘꼬꼬무’)

2025-01-31     정석희 칼럼니스트

[엔터미디어=정석희의 TV 돋보기] 별 해괴망측한 일을 다 겪는다. 그러나 살아보니 나쁜 일에도 이로운 구석이 있기 마련, 깨달음을 준다거나 반성을 하게 한다거나. 이번 사태 속 이로운 점은 옥석이 가려진다는 사실이다. 일례로 국회의원 김민전. ‘백골단’을 ‘반공청년단’이라며 국회로 불러들여 기자회견을 주선했다. 비난이 쏟아지자 서둘러 기자회견 취소를 선언했는데 이미 열린 기자회견을 어떻게 취소한다는 건지. 그러면서 자신은 ‘백골단’을 모른단다. 모를 수가 있을까? ‘백골단’이 왕성히 활동하던 시절 서울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충무로 대한극장 건너편 KFC 앞,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보도블록 위에 소박한 크기의 동판 하나가 놓여 있다. 예전에 지나가다 본 기억이 나서 며칠 전 들러봤다. 김귀정 사망 현장. 1991년 5월 성균관대학생 김귀정이 민주화 시위 중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숨진 자리다. 어떤 시위였느냐. 그 얼마 전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역시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에 항의하는 시위였다. 이 두 학생을 그야말로 때려서 죽인 게 바로 일명 ‘백골단’이다. 주로 청바지를 입고 하얀 헬멧을 쓰는 백골단이 철근이 든 죽도와 쇠파이프로 학생들을 무참히 가격해 살해한 거다.

어지간해서는 감정에 휘말리지 않는 성정이지만 동판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울컥했다. 이십대 꽃다운 여성, 공부하는 학생을 어떻게 때려죽일 수가 있나. 故 김귀정이 1966년생이고 김민전이 1965년생이다. 자신과 같은 연배가 다른 학생의 죽음에 항의를 하다가 그 파릇파릇한 나이에 매를 맞아 죽었는데 김민전은 60 나이에 기상천외한 짓을 한다. 제 자식 낳아 기르는 사람이 어떻게 학생들을 살해한 집단을 ‘애국’으로 포장해 국민에게 소개할까?

몰랐다면 무지한 거고 시대의식이 없는 것이고 알고도 그랬다면 후안무치고. 그가 ‘백골단’을 모를 수 없는 또 한 가지. 남영동에서 물고문으로 요절한 박종철 학생과 같은 시기에 서울대를 다녔다. 박종철은 64년생이고 김민전은 65년생. 심지어 같은 부산 출신, 동향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책임자가 전 치안감 박처원, 본 사건의 은폐를 지시한 인물이다. 지난 16일에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그날의 이야기는 '이름 없는 기술자' 편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드러내지 않은 채 암약해온 고문 기술자 이근안 사건. 여기에도 박처원이 등장한다. 이근안을 발탁해서 적극 기용한 자가 바로 박처원이다.

이근안의 고문을 받고 수많은 사람이 거짓 자백을 하여 교도소에 수감 되었고 심지어 사형이 집행된 분도 있다. 출소 후에도 민주화 전까지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았으며 고문 후유증으로 불구가 된 분들이 부지기수. 정신적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한 분도 계시다고.

전두환 대통령 시절 이근안은 어마어마한 실적을 쌓으며 거의 매년 특진을 했다. 40대 중반에 경감 자리에 올랐고 상도 열여섯 개나 받았다나. 그러다가 민주화가 되면서 쫓기는 신세가 되고 10년을 숨어 살다가 결국 자수를 하는데 몇 년 형을 받았느냐, 고작 7년이다. 2000년 대법원에서 징역 7년을 확정 받았는데 다른 혐의는 도망을 다니는 사이에 공소시효가 만료되었기에 한 사건만 처벌받은 것.

2008년 그가 목사로 변신했다는 기사를 보며 혀를 찼는데 그 뒤 2012년 자서전을 내고 헛소리를 하고 다니는 건 까맣게 몰랐다. <꼬꼬무>가 알려주지 않았으면 쭉 모르고 살았으리라. 자서전에 의하면 그간 알려진 고문 행위는 모두 피해자들이 과장한 이야기란다. 악랄했던 전기 고문도 작은 건전지 두 개만 사용했을 뿐인데 눈을 가린 피해자들이 오해한 거라나.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애국이었으니까. 애국은 남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지난해 피해자 가족들이 이근안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그리고 2024년 6월 재판부는 이렇게 판결했다. "이근안의 고문 행위뿐만 아니라 자서전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를 했다는 점까지 인정한다." 국가와 이근안이 배상해야 할 액수는 수십억 원에 달한다. 그러나 이근안은 묵묵부답. 그럼 누가 낼까? 국가가 먼저 내고 이근안에게 청구하게 되는데 이근안이 끝까지 책임을 지지 않으면? 세금으로 처리될 테니 결국엔 우리가 내는 거다.

<꼬꼬무>는 보통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야’로 마무리 되지만 그날은 진행자들이 엔딩 멘트를 하지 않았다. 대신에 이 말을 했다. “여기까지가, 바로 지금, 오늘의 상황이야. 이 사건은 현재 진행형이야. 우린 아직 그에게 들어야 할 말도, 받아야할 것도 남았으니까.”

둘러보면 사방천지 아직 끝나지 않은 일들이 너무나 많다. 서둘러 마무리하려 들 것이 아니라 시간이 걸리더라도 들어야 할 사과는 받고 내려야 할 벌은 내리고, 일벌백계로 다스렸으면 한다.

 

정석희 TV칼럼니스트 soyow59@hanmail.net

[사진=SBS, M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