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눙치고 들어가는 한석규를 믿어(‘신사장 프로젝트’)
낭만적인 한석규는 힘 빼는 연기로 현실감을 만들어낸다(‘신사장 프로젝트’)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아저씨. 나 이 빨래 좀 널읍시다.” 자신을 집주인이 무시했다며 연립주택 옥상에서 휘발유를 온 몸에 뿌린 채 죽어버리겠다고 협박하는 한 사내. 불이라도 붙으면 자칫 연립 전체가 타버릴 위기 상황에 크록스에 늘어진 운동복 차림으로 빨래를 한 가득 들고 옥상으로 올라온 신사장(한석규)이 엉뚱하게도 그런 말을 늘어놓는다. 전혀 긴장하지 않고 일상적인 목소리로 하는 신사장의 말에 사내가 오히려 당황하고, 신사장은 슬슬 사내에게 다가와 그를 대변해주기도 하고 초코우유를 건네기도 하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렇게 흥분을 가라앉힌 사내는 끝내 투입된 경찰병력에 체포된다.
tvN 월화드라마 <신사장 프로젝트>가 보여준 첫 번째 시퀀스는 신사장이라는 이상한 인물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드러낸다. 이 인물은 세상의 자잘한 분쟁에 뛰어들어 세치 혀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할 작정이다. 그런데 그 자잘해 보이는 분쟁은 저 휘발유를 온 몸에 뿌리고 불을 질러 버리겠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 될 수도 있다. 경찰이 해결해야 될 사건이지만 신사장이 나서는 건 공권력 투입보다 자신의 설득이나 협상이 훨씬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엄청난 사건도 알고 보면 누군가의 억울한 감정들이 풀어지지 않고 쌓여 생겨난 것이고, 신사장은 그런 걸 풀어내고 협상하는데 기막힌 재능을 발휘하는 인물이다.
이처럼 <신사장 프로젝트>의 이야기는 활극에 가까울 정도로 현실성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세상에 신사장 같은 사람이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인물은 동네 통닭집 사장이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법조계 밥 30년 먹은 관록 있는 부장판사 김상근(김상호)이 조필립(배현성) 같은 촉망받는 신입 판사를 이 통닭집에 낙하산으로 꽂아 넣는다. 그래서 조필립은 이 통닭집에서 청소에 배달, 외근 업무까지 하게 된다. 이게 현실성이 있는 이야기일 수 있을까.
그런데 조필립이 신사장과 함께 하는 ‘외근 업무’가 수상하다. 한 방송사의 잘못된 방송으로 궁지에 몰린 강춘젓갈 조합원들이 법에 호소하려는 문제를 김상근 판사는 신사장에게 의뢰한다. 신사장은 조합원을 찾아 그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고 그 뒤에 숨겨진 거대한 흑막까지 찾아내 문제를 해결한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있지만, 신사장은 주먹보다 세치 혀로 협상을 하거나 진상을 파악해 문제를 해결한다.
법보다 더 효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신사장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는, 황당한 설정이지만 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현실을 꼬집는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개연성을 두고 보자면 믿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지고, 해결되는 방식 또한 그렇지만, 신사장 같은 존재가 있어 법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일들을 척척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판타지를 자극한다. 바로 이 강력한 판타지가 황당한 블랙코미디 설정도 그저 받아들이며 보게 만든다. 이게 <신사장 프로젝트>가 만들어내는 몰입감이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건 다름 아닌 ‘신사장’이라는 판타지적 존재를 믿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흥미로운 건 이를 위해 한석규가 하는 연기의 방식이다. 황당한 캐릭터를 그는 과장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천연덕스럽게 눙치고 들어온다. 그냥 그런 인물이 있다고 또 그런 상황이 있다고 상정하고 슬그머니 들어오는 것. 저 첫 시퀀스에 불을 지르겠다고 엄포를 놓는 사내 앞에 뜬금없이 빨래를 널겠다고 들어서는 것처럼 그의 등장은 자연스럽다.
고수들은 결정적 순간에 힘을 오히려 뺀다고 하던가. 한석규는 힘 빼는 연기로 현실감을 만들어낸다. 나 돈키호테 같은 ‘신사장’ 캐릭터야! 라고 외치기보다는 슬쩍 들어와 이런 인물도 있어. 그러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믿어. 하고 말하는 식이다.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지만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과, 세상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지만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신사장 같은 캐릭터를 만들어내는데, 한석규는 그런 ‘낭만적인 인물’에 오히려 힘을 뺀 생활연기로 현실감을 만든다. 그것 역시 시청자들이 원하는 일이니.
이런 연기는 이미 <낭만닥터 김사부>에서도 한석규가 보여준 바 있다. 물론 한석규의 연기가 다 그런 건 아니다. 지난 작품이었던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같은 작품은 잔뜩 힘을 준 연기로 그 인물이 가진 양가적인 복잡한 감정을 얼굴에 그려 넣지 않았던가. 하지만 김사부나 신사장처럼 낭만적인 캐릭터에서는 정반대로 힘을 뺀 모습으로 성큼 시청자들의 마음을 파고든다. 특유의 신뢰 가는 목소리가 그 눙치는 연기와 겹쳐질 때 우리는 정신없이 그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심지어 황당한 판타지라고 해도.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gmail.com
[사진=tv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