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돈 들여서 왜 저런 걸 만들까, 지상파 기죽인 ‘저스트 메이크업’
호평 쏟아진 ‘저스트 메이크업’, 지상파 방송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엔터미디어=정석희의 TV 돋보기] 요즘 TV를 보다 보면 어쩜 아이디어가 저렇게 없을까 싶다. 만날 하던 이야기 또 하고 그 나물에 그 밥, 돌려막기나 하고. ‘돈 들여서 왜 저런 걸 만들까? 그러니 누가 TV를 보겠니?’ 하고 혀를 차게 되는데 얼마 전 모처럼 박수가 절로 나오는 프로그램이 있어 소개한다.
지난 7일 메이크업 계의 <흑백요리사>라 할 쿠팡플레이 <저스트 메이크업> 파이널 라운드가 공개됐다. 파이널 미션의 주제는 ‘DREAMS’. 각자가 꿈꾸는 세계를 화보로 구현하는 과제였는데 모델들이 놀랍게도 노배우들이다. 80대 원로 배우 김영옥, 반효정, 정혜선 씨로 수십 년간 드라마에서 존재감을 입증해온 분들이다. 최후의 3인 ‘파리 금손’, ‘손테일’, ‘오 돌체비타’가 배우들의 꿈을 구현하는 방식으로 승부를 펼쳤다.
‘오 돌체비타’의 모델은 정혜선 배우다. 정혜선 씨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액션 배우’라는 사실이 방송에 소개된 적이 있는데 1970년 작 영화 <홍콩에서 온 마담 장>에서 스턴트맨 없이 애드벌룬에서 내려오는 장면을 촬영했다고. 그런 만큼 액션 배우로서의 긍지와 꿈을 여전히 간직하고 계셨나 보다. ‘오 돌체비타’는 이 서사를 ‘꺼지지 않은 꿈’으로, 애드벌룬 장면을 낙하산으로 재해석했다. 완성된 화보는 숨이 멎을 만큼 놀라웠다.
김영옥 씨는 평생 한 번도 화보 촬영을 해본 적이 없단다. 30대부터 어머니 역할을 시작해 심지어 동료 배우 신구 씨의 어머니로 나온 적도 있지 않나. 그러면서 할머니 이미지에 갇히는 바람에 우아한 캐릭터를 연기해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고. 그래서 ‘손테일’은 김영옥 배우를 ‘우아하게 시간을 입은 여왕’으로 변신시켰다. 주름이라는 결함을 세월의 기록으로, 품격으로 끌어올렸다. 젊어 보이는 화장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존중하는 화장이 아닌가. 굳이 ‘최후의 3인’ 중 직접 메이크업을 받아보고 싶은 아티스트를 꼽으라면 나는 ‘손테일’이다.
반효정 씨는 ‘저승사자’를 희망했다. 2011년 SBS 드라마 <49일>에서 정일우의 ‘선배 스케줄러’로 등장했던 기억 때문이리라. 당시 저승사자가 바이크를 타고 등장하는가하면 스타일도 아주 파격적이었다. 카메오라고 해야 할 정도로 분량이 적었지만 그럼에도 워낙 중견배우에게 색다른 역할이 주어지는 경우가 드문지라 귀한 기억으로 남았나 보다. ‘파리 금손’은 반효정 씨를 ‘영혼을 인도하는 존재’로 그렸고 검은 나비와 늑대 이미지를 더해 완성도를 높였다.
압도적인 기운의 이 세 배우가 지난 수십 년간 맡아온 역할을 떠올려 보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액션 배우가 온갖 시어머니 역할로, 대가족 서사의 최고 연장자로만 평생 소비됐으니 얼마나 속이 터졌을까. 특히나 김영옥 씨는 캔디형 주인공의 할머니, 혹은 치매 노인으로 주로 등장해왔지 않나. 지금도 tvN <태풍 상사>에서 오미선(김민하)의 치매 걸린 할머니로 출연 중이다. 평생 남의 이야기 속 양념 같은 역할을 해온 배우들이 이번 작업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갖게 된 것이 반갑고 고맙다. 문득 고 여운계·김영애·김자옥 배우가 떠오르기도 했다. 박원숙, 나문희 배우도 마찬가지고. 그분들이 이런 화보를 한 번이라도 찍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승은 ‘파리 금손’에게 돌아갔다. 우승 여부보다 중요한 건 메이크업이 기술을 넘어 창의력과 서사가 결합한 예술의 단계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심사위원과 참가자들 사이에 존중과 배려가 돋보였고 악마의 편집이며 억지 갈등 없이도 흥미진진해서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뜻깊었던 건 우리와 수십 년의 시간을 공유해온 원로 배우들에게 평생 다시없을 선물을 안겼다는 점이다. 이 순간, 피할 수 없는 질문이 떠오른다. OTT 채널이 이런 기획을 진행하는 사이 지상파 방송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언제까지 안일할 건데? 언제까지 게으를 건데?
정석희 TV칼럼니스트 soyow59@hanmail.net
[사진=쿠팡플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