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을 위한 행진곡’은 여럿이다
2011-05-26 나도원
-‘임을 위한 행진곡’은 아프고, 예쁘다
[엔터미디어=나도원의 오늘 이 노래] 오월은 예쁘다. 햇살은 눈을 가늘게 뜨도록 하고, 봄을 알리던 꽃이 하룻밤 사이에 사라진 자리는 놀랄 만큼 커버린 이파리들이 뒤덮으며, 이미 떨어져 흙이 되어가는 벚꽃의 잔해마저 아름다울 따름이다. 오월은 아프다. 역사의 아픔을 되새겨야 하는 날짜가 달력 곳곳에 새겨져 있고, 먼저 고개를 돌려버린 이들의 이름을 기억나게 하며, 지금 그들이 보기에 이 곳은 어떠한지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이 묘지를 찾아 고개를 숙이는 이유는 아마도 미안하고 부끄러워서일 것이다. 그래서 오월은 예쁘고, 아프다.
어떤 노래의 탄생
사람들이 모여 부르는 노래는 많다. 하지만 그 자체로 역사가 된 노래는 많지 않다. 묘지와 거리에서 불린 노래가 있다. 윤상원과 박기순이란 남녀가 광주에 있었다. 둘은 가까웠고 ‘들불야학’을 함께 한 사이다. 대학을 다니다 노동현장으로 간 여인이 먼저 세상을 등졌고, 남자는 1980년 5월에 광주에서 시민군이 되어 전사했다. 그리고 겨울에 노래 하나가 만들어진다.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 혹은 노래굿 ‘넋풀이 - 빛의 결혼식’을 위해서였다.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를 황석영이 노랫말로 바꾸고, 1979년 대학가요제에 영랑과 강진으로 참가해 은상을 받은 적도 있는 김종률이 곡을 썼다. 초의 눈물이 된 모든 이들을 위한 곡, ‘임을 위한 행진곡’의 탄생이다.
팔레스타인 영화에는 순교자들이 출정 전에 찍은 영상을 비디오가게에서 빌려 보는 장면이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선 안중근 의사의 사진이 인쇄된 엽서가 유행했다. 하지만 20세기 한국의 주민들에게 최대한으로 허용된 자유는 광주와 그 곳의 사람들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른 척하게 할 수는 있어도 아예 모르게 할 순 없었다. 후에 더 많은 이들은 자기와 동시대에 무수한 시민들이 우리 국군에게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고야 만다.
아물지 않은 상처에 대한 집단적인 교감을 어루만지는 노래가 필요했다. 그러나 너그러운 군사정권은 그런 노래를 부르거나 아니면 잡혀가거나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을 주었다. 그럼에도 보호의 역할을 하면서 감금의 용도까지 지니는 벽은 그림이 걸리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그 벽에 노래가 걸렸고, 번져갔다. 나중에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와 같은 민중가요 판의 히트송은 학생운동단체가 조직적으로 보급했지만, ‘임을 위한 행진곡’은 시나브로 거리의 노래가 되어 있었다.
‘색다르게’ 불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
가장 많이 낯익은 ‘임을 위한 행진곡’의 얼굴은 결의에 찬 투쟁가일 것이다. 늘 약자와 함께 해온 노래패 꽃다지가 그렇게 노래했다. 다른 편에는 노래를찾는사람들처럼 비장하고 아름답게 불러 음반에 실은 경우도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세상이 좋아지자(?) 영화 ‘화려한 휴가’에 삽입되기에 이른다. 여기까지가 일반에 널리 알려진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그런데 실은 2000년대에 들어 전혀 다른 색을 입고 다시 태어난 또 다른 ‘임을 위한 행진곡’들이 있다.
붉은 물결을 출렁이게 한 ‘오, 필승 코리아’가 실린 2002 월드컵 응원앨범에 ‘님을 위한 행진곡’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에 놀랄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펑크 밴드 버닝 햅번이 느닷없이 방방 뛰는 펑크 송으로 만들어놓았는데, 치기라고 생각해버리면 오해이다. 그들은 꽤 괜찮은 펑크 뮤지션들이니까. 또, 2006년에는 대중음악인들이 대거 참여한 음반 [아가미]에 하림이 유럽 민속음악 풍으로 독특하게 해석하고, 정재일이 새롭게 편곡해낸 ‘임을 위한 행진곡’이 담겼다. 특히 처연함을 자아내는 한대수의 걸걸한 음성과 장엄한 합창 덕에 근사한 버전으로 남을 수 있었다.
5·18기념재단이 제작한 음반 [5월의 노래](2006)에는 인디음악동네를 대표하는 중견 밴드인 허클베리 핀이 참여하여 ‘임을 위한 행진곡’을 격렬한 록으로 재탄생시킨 적이 있다. 리메이크가 아니라 헌사의 형식이지만 재즈도 있다. 강은영 쿼텟의 ‘Someday - 임을 위한 행진곡을 위하여’가 그것이다. 노래운동과 가극 활동을 하다 재즈에 심취하여 유학을 다녀온 강은영이 외국인 연주자들과 함께 쿼텟을 결성하고 발표한 앨범 [Someday](2007)에 수록되어 있다. 이 앨범의 곡들은 민중가요의 뉘앙스를 재즈에 얹고 ‘극’적인 창법을 더한 이채로운 품새였다. 이처럼 다양하게 변주되던 곡을 원작자인 김종률이 2008년에 음반 [님을 위한 행진곡]을 발표하여 곡이 지닌 본래의 아름다움을 확인시키게 된다.
최근에는 발칙한 시도까지 더해졌다. 달랑 “탐관오리야, 솜방망이를 받아라!”라고 노래하는 ‘솜방망이’를 비롯하여 극우세력과 기성사회에 야유를 보내는 밤섬해적단의 데뷔앨범 [서울불바다](2010)에서도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잠깐 들을 수 있다. 노래방에선 민중가요를 부르고 정치의식 없는 젊은 세대를 나무라지만 정작 자신의 모습은 돌아보지 못하는 기성세대를 탓하는 ‘386’에 삽입시켰다. 이것도 요즘 20대에 대한 사려 깊지 못한 단순화와 마찬가지로 386세대에 대한 일방적인 규정이겠지만, 잠시나마 통쾌한 구석이 없진 않다. 무례해 보인다면, 밤해적단의 보컬 겸 베이스로 활동하는 장성건이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인 폐허로 발표한 세 번째 앨범 [맞불](2011)을 통해 오해를 풀 수 있을 것이다. 2007년에 데모로 들은 바 있는 이 앨범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진지하고 음산하며 구슬픈 블랙메탈로 변신했다.
그래서 이 노래는, 아프고 예쁘다
한국은 민주화 이후 눈부신 성장을 거두었다. 자살율과 산업재해, 노동시간과 빈부격차, 그리고 낮은 복지수준 등에서 한국은 선진적인 국가이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 다른 곳에 썼던 글을 인용하면, 교복만 놓고 봐도 의미가 달라져서 군사문화와 학생지도의 구습으로 사라졌다가 빈부격차에 의한 위화감 해소를 위해 부활했다. 마샬 맥루한은 과거엔 계급제가 사회변화의 감속장치였다고 보았다. 지금 자본과 국가는 자신들의 목적과 주민의 목표를 일치시켜놓고 있다. 지금은 이 구조가 변화의 감속장치이다.
이러한 시대에 민주주의는 무얼까. 광주정신과 민주주의를 선진일류국가를 만드는 에너지로 승화시키자는 기념사는 민주주의가 얼마나 제멋대로 적용될 수 있는지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 대신 ‘방아타령’이 연주되었다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다. 이젠 지극히 당연한 개념들도 KTX로 운반해 와야 할 것만 같다. 그나마 고장이 잦아서 탈이지만.
그래도 다양성의 확장은 막을 수 없다. 세계화로 인하여 기존 질서의 구속력이 약화되고 개인주의가 강화되었다는 앤서니 기든스의 말대로, 이 변화는 부정적일 수 있지만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도 이렇게나 여러 가지 색을 지니게 되었다. 물론 스마트폰을 쓴다고 스마트휴먼이 되지 않듯이 이 노래를 부른다고 모두 투사인 건 아니다. 그래도 ‘임을 위한 행진곡’은 여전히 묘지와 거리에서 불리고 있으며, 때론 화관을 쓴 예수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노래는 지금도 거기에 있다. 그래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아프고, 예쁘다.
칼럼니스트 나도원 <대중음악평론가> nadowon@naver.com
[사진=‘꽃다지’, ‘허클베리 핀’, ‘장성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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