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백’, 글래디에이터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연

2011-08-16     정덕현


- 계백도 광개토태왕도 글래디에이터가 된 이유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드라마 공감] 역시 '계백'도 '글래디에이터'를 벗어날 순 없었던 걸까. 사극의 역사왜곡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퓨전사극이 주창해온 상상력. 그 상상력의 빈곤을 말하는 것이다. 형장으로 끌려가던 계백(이현우)은 신라군의 기습에 의해 포로가 되고 전쟁노예로 성장한다는 설정. 이 이야기는 다름 아닌 사극이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하는 '글래디에이터' 시퀀스다. 주인공은 가족을 잃고 노예가 되어 변방으로 쫓겨나고 거기서부터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며 점점 성장해 돌아와 복수를 한다는 이야기.

'계백'의 '글래디에이터' 시퀀스에는 신라 장수 김유신(박성웅)이 등장해 앞으로 두 사람 간에 펼쳐질 맞수대결을 예고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늘 사용되는 스토리전개 방식이다. 노예시절 만난 동료 혹은 적이 훗날 성장한 주인공과 대업을 이뤄가거나 혹은 경쟁자가 되는 구조다. 이것은 '계백'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주말 KBS사극 '광개토태왕'의 주인공 담덕(이태곤) 역시 노예상인들에게 붙잡혀 광산으로 팔려가는 모습이 등장한다. 이 사극이 활용하는 '글래디에이터' 시퀀스의 뿌리는 깊다. 이미 '대조영', '해신'에서도 똑같은 상황들이 주인공을 노예로 전락시키고 그가 복수를 하기 위해 돌아오는 스토리를 구사하고 있다.

도대체 왜 사극은 무리를 해가면서도 그토록 '글래디에이터' 시퀀스에 집착하는 걸까. 그만큼 이 스토리 구조가 갖는 힘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그 사극이 한 영웅의 탄생과정을 그리는 스토리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 전형적인 구조는 이미 역사 속에 새겨진 로마 검투사의 반란에서부터 비롯되어 영화 '벤허', '스팔타커스' 등에 의해 반복되어 활용되었고, 최근 들어서는 영화 '글래디에이터'와 드라마 '스파르타쿠스'로 돌아와 그 사라지지 않은 힘을 과시하고 있다. 영웅담으로서 이만한 소재가 없는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네 사극이 이 '글래디에이터'의 언저리를 매번 방황하는 것은 어딘지 너무 손쉬운 선택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즉 사극이라면 아무리 상상력의 틈입을 허용한다고 해도 그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해서 스토리를 짜야 하는 것이 아닐까. '광개토태왕'이라면 그 정복자로서의 이야기에서 뭔가 새로운 상상력을 추가하는 편이 훨씬 나을 수 있고, '계백'이라면 나라를 위해 처자식까지 모두 제 손으로 죽이고 전장에 나가야했던 한 장수의 비운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물론 사극이라는 대장정에 '글래디에이터' 시퀀스는 하나의 재미요소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늘 반복되는 이 시퀀스가 여전히 매력적인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계백'에서 선화공주와 의자왕자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 평생을 바치는 무진(차인표)과 그를 사랑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적이 되어 있는 사택비(오연수), 그리고 그 사이에 얽혀진 의자왕자의 와신상담 이야기가 오히려 더 매력적이다. 결국 무진이 자청한대로 의자왕자가 그를 사택비가 보는 앞에서 찌르는 장면은 실로 절묘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의자왕자에게는 사택비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는 복수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의지하는 존재를 스스로 죽이는 비극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상상력이다.

일찍이 사극이 역사를 버리고 상상력을 택했을 때, 대중들은 열광했다. 그 무거운 역사의 갑옷을 내려놓자 사극이 드라마로서 마음껏 나갈 수 있는 길이 넓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비슷비슷한 시퀀스들의 나열처럼 여겨지는 상황에 도래한 사극이 더 이상 역사의 무게 운운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 될 것이다. 상상력도 소재를 연구하는데서 다양함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상상력의 빈곤을 드러내는 사극은 어쩌면 이제 다시 역사를 뒤져 봐야할 때가 아닐까.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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