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가 필요없는 세상이 오면

2011-11-03     듀나


- '인 타임', 미래를 다루는 영화의 치명적 단점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앤드루 니콜의 <인 타임>은 유전공학으로 25살 이후 사람들이 나이를 먹지 않게 된 미래 세계가 무대다. 여기엔 단점이 있어서, 사람들은 그 뒤로 오로지 1년치만의 수명을 보장받으며 그것을 조금씩 화폐 대신 지불해야 한다. 화폐가 목숨과 연결된 세계인 것이다. 당연히 극단적인 부익부빈익부의 시스템이 생겨난다. 부자들이 사들인 수명으로 영생을 누리는 동안, 가난한 사람들은 버스값이 모자라 뛰어가다가 수명이 떨어져 죽는다. 끔찍하지만 웬지 친근하기도 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많지만, 오늘은 다른 이야기를 하기로 하자. 도대체 이 세계는 몇 년 뒤인가? 이미 100살을 넘긴 사람들이 여기 저기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최소한 100년 뒤이다. 넉넉 잡아 200년이라고 치자. 그런데 이 사회의 기술수준은 왜 그런가? 차는 모양만 조금 다를 뿐 우리가 타고 다니는 차 그대로이고, 특별한 기술적 진보는 눈에 뜨이지 않는다. 심지어 여러 모로 퇴보했다. 이 영화에는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고, 동네엔 ATM도 없다. 여러분은 휴대전화가 없는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가?

물론 난 니콜의 세계가 왜 이 꼬락서니인지 안다. <인 타임>의 세계는 너무나도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우리세계와 연속선을 만들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일종의 평행우주 세계로 보는 게 편하다. 그렇다면 굳이 연속적인 기술발달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여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으니, 휴대전화와 ATM은 드라마의 위기상황을 막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얼마 남지 않은 수명 때문에 달린다. 친구나 가족을 만나 수명을 받지 못하면 죽는다. 끝내주게 절실하고 상징적인 장면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두 문명의 이기만 있으면 문제는 단번에 해결된다. 아니, 하나만 있어도 된다.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폰뱅킹으로 수명을 보내달라고 하면 되니까.

휴대전화의 발명은 수많은 드라마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요새 호러 영화 각본을 쓰는 작가들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주인공의 휴대전화를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얼마 전에 개봉된 <샤크 나이트>만 해도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 호수 속 섬에서 벌어진다.) 아직 핑계가 몇 개 남아있지만 이것도 언제까지 끌지는 않을 거다. 핵전지가 보편화되면 배터리 방전의 핑계는 사라진다. 통신방해지역은 사라질 것이고 기기들이 축소되어 몸 안에 들어갈 수도 있다. 위기상황은 점차 사라지고 곧 모 운송서비스의 광고가 말하듯 드라마가 필요없는 세상이 올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아이디어에 저항한다. 추리소설을 쓰는 사람들, 특히 일본 퍼즐 미스터리 작가들은 유전자 검식이 그렇게 싫은 모양이다. 아마 그들은 법적증거로 채택될 수 있는 거짓말탐지기가 나오면 더 싫어할 것이다. 그 기계가 보편화된다면 추리작가 뿐만 아니라 드라마를 쓰는 모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를 것이다. 거짓말이란 인간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재료 중 하나다. 편리함과 안전과 정의실현 따위를 위해 그 소중한 재료를 강탈해도 되는가?

물론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에 동의할 것이다. 소설이나 책을 재미있게 만드는 재료들은 현실세계에서는 대부분 불쾌하고 혐오스럽다. 그들이 재미있는 이유는 남의 고생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영원히 견디라고 하면 받아들일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현실세계의 건조함에 질린 남자들은 근육질 주인공이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때려잡는 로버트 E. 하워드의 소설에 열광하지만, 정작 그가 만든 세계 하이보리아에 살면서 재미있을 사람은 주인공 코난 뿐이다. 그리고 독자들은 코난이 아니다. 그리고 세계는 코난이 아닌 사람들도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진화해왔다. 휴대전화는 그 일부일 뿐이다. 매스컴, 현대 법률, 정치 시스템, 상식 역시 그 진화의 결과이다.

여전히 우리는 드라마의 세계를 산다. 최근 보궐선거와 그 이후에 이어질 드라마, <도그마> 사건 등등은 고전적인 선과 악의 대결 구도를 갖는다. 나에게 정말 이상한 것은 여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장르적 악역을 맡는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도가니>가 과장되었으니 공지영 작가가 경찰 조사를 받아야한다고 주장하는 한나라당 인권위원회 사람들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그들은 마치 자신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보이는지 모르는 영화 속 이류 악당처럼 보인다. 만약 소설가나 영화 각본가가 이 이야기를 그대로 담는다면 그들은 진부하고 유치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나는 낙천적이라, 인류의 수명이 끝나기 전에 이런 불필요한 드라마의 가능성이 천연두나 그리스의 신들처럼 사라질 것이라 믿는다. 아마 미래 사람들은 나른한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야만적인 21세기의 역사책을 읽으며 오후를 보낼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이 이야기를 즐기기 바란다. 그 세계를 사는 나에겐 이 바보스러운 이야기를 체험하는 건 전혀 재미없기 때문이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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