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본드’에 담긴 무척이나 씁쓸한 우리네 현실

[엔터미디어=정덕현] “국가의 명령이다.” SBS 금토드라마 <배가본드>에서 차달건(이승기), 고해리(배수지)와 함께 비행기 폭탄테러의 증인인 김우기(장혁진)를 보호하려 사투를 벌이던 기태웅(신성록)은 국정원장의 그 말에 갈등하기 시작한다. 지원을 빙자해 투입된 암살조 앞에서 차달건과 고해리 그리고 김우기가 죽을 위기에 처했음을 알면서도 선뜻 나서지 못한다. ‘국가의 명령’이라는 말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과연 국가의 명령인가. 국가를 호명해 개인적 치부와 권력을 잡으려는 이들의 비뚤어진 욕망인가. 차세대 전투기 도입을 두고 존엔마크사 제시카 리는 경쟁사인 다아나믹사 기종의 민항기를 테러해 여론을 자사에 유리하게 돌리려 하고, 이것은 국정원 내부의 민재식 국장(정만식), 국방부 정책실장 박만영(최광일) 그리고 쉐도우로 불리며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윤한기 민정수석(김민종)까지 연관되어 있다. 게다가 대통령 정국표(백윤식)나 홍순조 국무총리(문성근)는 사실상 이런 일들을 방조하다시피 한다. 앞에서는 국민을 호명하며 눈물까지 흘리지만 자신의 정치적 이득만을 생각하는 인물이다.



이러니 국가의 이익이란 저들의 말은 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심지어 비행기 테러로 자국민들이 아이들까지 사망했지만 진상규명 같은 건 애초 저들에게는 관심조차 없는 것들이다. 대신 어떤 것이 정치적 이득인가 아닌가를 판단하고, 어떤 것이 저들의 돈과 권력에 유리한가만을 저들은 판단한다.

<배가본드>는 이런 국가 수뇌부와 국정원까지 연루된 게이트를 다루는 액션 장르의 드라마지만, 그 밑그림으로 과거 정권들이 만들어냈던 현실들을 환기시킨다. 이명박 정권 시절의 BBK사건 의혹 같은 권력을 통한 개인적 치부와, 박근혜 정권을 무너뜨린 스모킹건이 됐던 비선실세 그리고 당시 벌어졌던 세월호 참사 같은 비극들이 묘하게 <배가본드>의 밑그림 안에 녹아 있다. 거기에는 국가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이른바 ‘나쁜 짓들’이 떠오른다.



“당신은 나라에서 월급 받잖아. 난 세금 내는 사람이고. 내 문제고 내가 해결할 일이야. 내 조카가 죽었으니까.” 김우기를 데리고 입국하는 배 위에서 차달건은 고해리에게 그렇게 말한다. 그는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월급 받는 사람은 그 주는 사람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그의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런데 공무원들에게 월급 주는 사람은 과연 국가인가. 아니다. 세금을 내는 국민들이다. 그래서 차달건의 이 대사는 스스로 가진 인식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건 그의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국민의 문제다. 세금으로 월급 받는 저들은 국가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게 아니라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하는 존재들인 것. 그 이야기를 들은 고해리가 현실을 이해한다면서도 내놓은 답변에는 이들이 조금씩 이런 사실을 몸소 깨달아가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래 맞아. 난 공무원이고 우리 엄마랑 동생도 부양해야 돼. 근데 다음번에도 이런 일 생기면 어떡할 건데? 그 때도 공무원이니까 국가에서 나쁜 짓해도 모른 척 못 본 척 그래야 하는 거네? 훈이하고 훈이 친구들 우리 아빠 고광철 대령님이 저 위에서 다 보고 있는 거 아는데. 하늘에서 보고 있는 거 내가 다 아는데. 근데 어떻게 무섭다고 나만 도망쳐. 이번에 국민들한테 제대로 알려줄 거야 나쁜 시키들 나쁜 짓 다시 못하게.”



사실 우리네 현실에서 국민들이 국가라는 이름에 갖는 인상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못하다. 그건 국민을 보호하고 지켜주기보다는 국민을 호명해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했던 권력자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억울한 죽음조차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해주지 않는 국가 앞에 어떻게 신뢰와 지지를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배가본드>에서 돈키호테처럼 차달건과 고혜리는 국가와 싸우게 되었다. 그건 물론 현실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들이 죽을 위기를 매번 넘기고 점점 저 부패한 권력의 실체를 까발리기 위해 다가가는 그 과정은 시청자들에게 강력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차달건의 일갈이 속 시원해지는 건 국가의 명령보다 국민이 우선이라는 우리 시대의 지엄한 정서가 깔려 있어서다.

“국가를 위해서 불철주야 수고 많으십니다. 뭐야 윤한기 민정수석도 와계시네? 야 기태웅이 정의로운 척 혼자 다 하더니 거기 붙어먹으니까 살만 하냐? 민재식 국장 야 넌 욕도 아깝다. 니들 다 엿 됐어 이 새끼들아! 내가 곧 박살내러 갈 거거든!”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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