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한수-귀수편’ 무협으로 시리즈의 세계관을 살리다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신의 한 수-귀수편>은 예상외로 재미있다. 뻔하고 황당한데도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영화는 대단히 익숙하고 원형적인 서사를 취하면서도 완성도를 잃지 않는다. 또한 드라마와 액션, 그리고 느슨한 코미디가 조화를 이룬다. 용병술도 적절했다. 권상우의 장점인 복근과 액션을 살리고, 그의 단점인 대사를 대폭 줄인 것이 주효했다. 주인공이 말이 없자, 그 공백을 김희원이 메워야 했는데, 언제나 그렇듯 김희원의 ‘악역인 듯 악역 아닌, 살짝 귀여운’ 느낌이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잘 조율해나갔다. 하지만 영화 <신의 한 수-귀수편>의 진정한 묘수는 따로 있다.



◆ 장르는 ‘무협’, 여기는 강호의 세계

<신의 한 수-귀수편>은 2014년에 개봉했던 <신의 한 수-생사편>에서 파생된 속편이다. 전편은 내기바둑을 소재로 한 범죄 액션물로 그럴듯한 재미와 만듦새를 보여주었지만,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것은 영화의 세계관이 썩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바둑은 도박이 아니기에, 운보다 실력이 중요하다. 속임수를 쓴 다 해도 실력을 감춘 고수가 대신 바둑을 둔다는 정도인데, 어째서 내기바둑이 도박과 같은 문법으로 흘러가는지 의아했다.

무엇보다 바둑의 고수가 될 만큼 머리도 좋고, 싸움을 잘할 만큼 몸도 좋고, 큰 판돈을 걸 만큼 돈도 많은 사람들이 왜 불나방처럼 살다 죽는지 모를 일이었다. 즉 바둑으로 생사를 건 도박을 벌이고, 결국 몸싸움을 하다 죽고 죽이는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속편은 그러한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소한다. 영화는 노골적인 무협의 서사를 취함으로써, 이 세계가 현실세계의 논리와 무관한 독자적인 ‘강호’의 세계임을 분명히 한다.



그렇다. <신의 한 수-귀수편>의 장르는 범죄 액션물이 아닌, ‘무협’이다. 주인공이 가족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길을 떠돌다 스승을 만나고, 기이한 수련 비법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경지에 도달한다. 이후 전국을 돌며 ‘도장 깨기’에 나서고, 굵직한 강호의 고수와 합을 겨루기를 여러 번. 그 사이 어떤 적은 죽고, 어떤 적은 그에게 목숨을 구걸한 뒤 수하가 되기도 하였으니...드디어 우리의 주인공은 필생의 원수를 만나 최후의 대결을 벌이게 되는데...로 이어지는 서사는 물론이고, 마침내 원수를 갚고 ‘안식’을 찾아 표표히 퇴장하는 그에게 누군가 ‘귀수’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그의 이름이 전설로 회자되었다는 에필로그까지 완벽하게 무협의 흐름이다.

<신의 한 수-귀수편>은 무협이기 때문에, 인물들은 리얼리티나 세속의 욕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들은 모두 강호의 문법에 따라 움직인다. 이들이 바둑을 두며 상대의 운명에 대한 점괘로 상대를 현혹하고, 승패에 따라 손모가지를 썬다고 해도 ‘왜’ 혹은 ‘어떻게’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세속의 인물이 아닌 강호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하필 철길 위에서 바둑을 두며 목숨을 베팅해도 너무 만화적이라고 비난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무협의 세계에서 벌이는 대결이니 개연성 보다 정신의 호방함이 중요치 않겠는가. 주인공이 처음부터 돈에 무관심한 것도 그 때문이며, 마지막 원수와의 일전을 앞두고 수많은 그의 수하들과 합을 겨뤄야 했던 오버스러운 설정도 무협의 장르를 떠올린다면 낯익은 수순이다.



전편과 느슨한 연결고리를 갖는 것도 영리한 설정이다. <신의 한 수-생사편>의 주인공 태석(정우성)이 감방에 갔을 때 옆방의 누군가와 바둑을 두었으나 한 번도 이기지 못하였는데, 그와 보이지 않는 바둑을 두었던 자가 귀수다. 석방 후 태석은 맹인 고수 주님(안성기)를 찾아가 귀수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후 태석의 바둑세계가 훨씬 깊어지는데, 주님은 “이 세상이 고수에게는 놀이터요 하수에게는 생지옥”이란 말을 들려주었다. 이 말은 속편에서 스승 허일도(김성균)가 귀수에게 해준 말로 다시 등장한다. 즉 허일도의 말이 귀수를 거쳐 주님을 거쳐 태석에게 간 것인데, 이런 느슨한 연결에 의해 귀수는 태석에게 ‘전설’로 기능한 셈이다.

요컨대 현실세계에 속한 채 여러 모순을 내포하던 태석에게 전설 같은 존재인 귀수의 이야기를 전사로 풀어내는 것은 현실의 강박에서 벗어나 원형적인 서사를 구축하는 것이 허용된다. 내기 바둑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의 ‘강호’를 그려 보이고, 내적 완결성만 구축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공하면 이를 전사로 삼아 전편의 세계도 구체성의 후광을 얻게 된다. 즉 ‘그런 세계가 있다’고 믿게끔 하는 신묘한 백그라운드를 얻게 되는 셈이다.



◆ 장르가 ‘무협’이어도 용서가 안 되는 것

영화 <신의 한 수-귀수편>의 가장 큰 단점은 구려 빠진 젠더의식이다. 영화에는 네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귀수의 누나, 황9단의 딸, 홍 마담, 부산잡초의 ‘깔치’.

누나는 희생물이다. 그런데 참 전형적이다. 동생을 위해 노동을 하고 성추행을 당한다. 성추행을 당한 뒤에도 그는 동생을 위해 밥상을 차리더니 갑자기 죽음을 택한다. 그는 한순간도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며, 성추행의 피해에 대해 곱씹거나 스스로 회복할 짬도 얻지 못한다. 오직 헌신적이며 결벽적인 존재로 그려지는데, 이는 남성이 원하는 이상적인 여성과 피해자의 이미지에 부합한다. 누나는 오직 동생의 장래를 위해 살고, 동생의 각성을 위해 죽어야 한다.



한편 귀수는 누나의 성추행을 목격한 순간 이를 저지하기 위해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했고, 그 후에는 가해자에게 사죄가 아닌 대결을 요청하였으며, 패배 후에는 열패감에 싸여 누나를 외면한 채 돌아누워 있다가, 누나의 시신을 두고 그대로 복수의 길을 떠난다. 그는 한순간도 누나의 입장에서 누나를 도우려 행동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울분과 상처에 몰입된 채 승부에 집착한다.

그의 복수는 과연 누구를 위한 복수였을까. 무당은 “왜 누나 내버려두고 그냥 갔어?”라고 읊조린다. 이는 귀수의 죄책감을 파고드는 말로, 귀수 역시 자신의 복수가 누나의 원한을 풀기 위함이 아니라, 누나를 침탈당하고 “기재가 전혀 없다”며 모욕당했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함이었음을 어렴풋이 안다. 하지만 그가 누나의 단추로 복수를 완성한 순간, 누나의 환영이 나타난다. 자신이 누나의 원한을 갚았다고 믿고 싶은 귀수의 정신승리다.



황9단의 딸은 인질이다. 귀수가 황9단의 딸을 납치함으로써, 황9단과 목숨을 건 승부를 펼치게 된다. 귀수는 황9단과 대결하면서 ‘내가 누나를 침탈당했듯이 나는 네 딸을 침탈하겠다’는 구도를 만든다. 여기서 귀수와 황9단이 대결의 주체이고, 누나와 딸은 그들의 부속물이 된다. 즉 귀수가 누나에 대해 품은 생각은 지순한 듯 보이지만, 실상은 내기도박에 ‘깔치’를 걸겠다던 부산잡초의 천박한 사고와 그리 멀지 않다.

그나마 영화에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 여성 캐릭터는 홍마담(유선)이 유일하다. 그는 내기 바둑 장소를 운영하며 바둑 실력도 상당하다. 그는 가장 인간처럼 보이는 남자 똥선생(김희원)의 청혼을 받는데, 이를 승낙하기 위해 홍마담은 2수를 접고 바둑을 져주어야 한다. 홍마담은 흥미로운 캐릭터지만, 영화는 그에게 분량을 허락하지 않는다. 특별출연으로 캐스팅하여 화면의 부족한 에스트로겐을 채우는 용도로 활용할 뿐이다.



<신의 한 수-귀수편>이 운용의 묘를 잘 살리고, 무협의 장르를 적극 차용하여 시리즈의 세계관을 확고하게 만든 성공적인 속편임에도 불구하고, 여성 캐릭터를 활용하는 방식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분명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찍던 대로 찍었을 것이다. 하지만 변화된 관객의 눈높이에 맞추려면 범죄물이든 무협이든, 여성에 대한 성찰과 인식이 필요하다. 한수를 접어준 채, “져주고 싶어도 웬만해야지”라던 홍마담의 탄식처럼, 한 눈을 감은 채 봐주고 싶어도 이건 도통 너무 구려서 견딜 수가 없다. 웬만하지가 않으니 말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신의 한수-귀수편>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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