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드 업’, 지상파 코미디가 시대와 호응하기 시작했다는 건

[엔터미디어=TV삼분지계] ◾편집자 주◾ 하나의 이슈, 세 개의 시선.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대중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는 정석희·김선영·이승한 세 명의 TV평론가가 뭉쳐 매주 한 가지 주제나 프로그램을 놓고 각자의 시선을 선보인다. 엔터미디어의 [TV삼분지계]를 통해 전문가 세 명의 서로 다른 견해가 엇갈리고 교차하고 때론 맞부딪히는 광경 속에서 오늘날의 TV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는 단초를 찾으실 수 있기를.

국내 정통 코미디가 점점 힘을 잃어가는 시대에, 그중에서도 더 생소한 하위장르인 스탠드 업 코미디에 도전한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16일 토요일 밤, 2부작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첫선을 보인 KBS <스탠드 업>은 제목에서부터 장르의 정통을 표방한다. 넷플릭스 <박나래의 농염주의보>로 한국형 스탠드 업 코미디에 대한 관심을 불러모은 박나래를 메인 MC로, 이 장르의 중심에 서 있기도 했던 박미선을 핵심 출연자로 내세우는 등 캐스팅에도 공을 들였다.



20년 전 <개그콘서트>라는 새로운 형식의 프로그램을 통해 정통 코미디의 명맥을 잇는 데 성공했던 KBS가, 수위 높은 뉴미디어 개그 콘텐츠들과의 경쟁으로 한층 치열해진 환경 속에서 또 한 번 실험에 성공할 수 있을까. 의 세 평론가가 <스탠드 업>의 첫 무대 감상을 통해 그 의문에 답했다.



◆ “저는 지금 즐기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저를 보고, 제가 하는 코미디를 보고 저거 웃어야 해? 안 웃을 수도 없고. 안 웃으면 장애인 차별하는 것 같고. 웃지 않으면 장애인 비하하는 거 같잖아?” ‘세상의 편견에 맞서 싸우는 장애인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라는 소개를 받고 무대에 오른 한기명 씨가 말했다. 순간 속을 들킨 양 뜨끔했다. 실제로 내심 걱정이 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처럼 서로 툭 털어 속을 열어 보이고 시작하니 선입견과 편견이 눈 녹듯 사라졌다. 무장해제 된 채 그저 웃을 수 있어서 좋았다. 다양한 출연진 구성도 돋보였고 박미선 씨가 ‘67년생 박미선’이라는 주제로 여성 개그맨의 입지에 대해 언급한 뒤 이어서 외국인 기자 알파고가 한국 사회의 모순을 꼬집는 등 기승전결이 있는 자연스런 흐름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깐족대고, 말꼬리 잡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가기 잘하는 유명 방송인들이 존재하지 않아서 좋았다. 예를 들어 천편일률적인 라디오 광고 풍자로 웃음을 준 케니나 듣도 보도 못했던 수영장 아이돌 개그를 펼친 송하빈이 MBC <라디오 스타>에 나왔다고 가정해보자. 아마 웃기니 안 웃기니, MSG를 쳤다 안 쳤다, 이모저모 평가하고 토를 달았을 게 분명하다.



파일럿 프로그램 KBS2 <스탠드 업>. 아직 발을 막 뗀 시점이라 소소하니 아쉬운 부분이 눈에 들어오긴 하지만 일단 박수부터 보내고 싶다. 한기명 씨의 마무리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저는 지금 즐기고 있습니다’와 장도연 씨의 마무리 ‘오늘을 즐기되 너무 막살지는 마세요’가 묘하게 잘 어우러졌다. 정규 편성을 바라는 <스탠드 업> 스스로의 다짐이리라.

정석희 방송 칼럼니스트 soyow59@hanmail.net



◆ 시대와 호응하기 시작한 개그

KBS 간판 코미디언 프로그램 <개그콘서트>의 한 제작진은 지난 5월 1000회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프로그램의 인기가 예전만 못한 이유로 ‘시대의 변화’를 들었다. 예전에 개그 코드로 즐겨 사용하던 외모 비하, 각종 차별과 혐오, 가학적인 내용 등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는 발언이었지만, 반성보다는 한탄처럼 들리기도 했다. <개그콘서트>가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는 데 여전히 고전하는 사이, 정작 ‘새로운 개그’는 예상치 못했던 파일럿 프로그램 <스탠드 업>을 통해 도착했다. 방영 전에는 검열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지상파가 성역과 금기에 도전하는 스탠드 업 코미디를 선보일 수 있을까라는 우려가 지배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같은 의문에 <스탠드 업>이 내놓은 대답은 역으로 지상파의 성숙함이었다. 다양성을 고려한 기획만으로도 충분히 호평 받을만 했다. 박나래를 진행자로 내세운 점이나 ‘여성 예능인의 고충’을 소재로 삼은 박미선의 무대를 통해 힘을 준 여성주의적 메시지, ‘국내 최초 장애인 스탠드 업 코미디언’ 장기명이 선보인 소수자로서 “세상의 편견과 맞서 싸우는” 개그, 터키인 출신의 귀화 코미디언 알파고 시나가 특유의 경계인으로서 바라본 한국 문화 풍자 개그 등 다채로운 무대 조합은 비로소 시대를 따라잡은 코미디가 도착했다는 신호다.

물론 주변의 일화를 끌어오는 과정에서 ‘타자화’의 위험 수위를 넘나든 무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자신의 삶과 경험을 통해 여성, 특히 차별받는 중년 여성의 사회적 조건을 성찰하고 풍자한 박미선의 무대는 한국 지상파 코미디의 품격을 높여준 최고의 3분이었다.

김선영 칼럼니스트 herland@naver.com



◆ 선을 넘는 게 다가 아니라니깐

“미국에선 이렇게 하잖아요.” KBS <스탠드 업>에서 가장 자주 나온 말은, 한국형 스탠드 업 코미디가 처한 딜레마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무대 위에 올라간 적지 않은 이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무기로 눈앞의 사람들을 웃기는 것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장르가 태동한 미국 코미디 씬을 끊임없이 의식한다. 미국에선 이런 것도 하던데, 여기는 미국이 아니라서 그런 것은 못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과 조건을 활용하는 대신 ‘미국 사람들이 많이 하는 장르 우리도 해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지?’를 걱정하는 상황. 정치나 인종차별 같은 이슈를 건드리자니 위험해 보이고, 그래도 미국 유명 스탠드 업 코미디언처럼 금기를 넘는 농담은 하고 싶고. 그러니 끊임없이 ‘미국이라면 이런 거 할 텐데’라는 변명을 먼저 앞세우고, 넘기 가장 쉽고 만만한 금기인 섹스 농담에나 집중하는 오류. tvN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 코리아>나 넷플릭스 <박나래의 농염주의보>에서 목격된 한계를, <스탠드 업> 또한 고스란히 반복한다.

<스탠드 업>에서 인상 깊은 순간을 남긴 건, 이 장르로 금기의 선을 넘어야 한다는 강박을 끊임없이 느끼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말 자기 이야기를 잘 들려주려다 보니 선을 넘은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비장애인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편견을 유머를 통해 폭로한 한기명이나, 중동 출신을 향한 한국 사회의 편견과 한국의 애국심 강권하는 분위기를 꼬집은 알파고처럼. 억지로 펀치를 쥐어짜내지 않고도 자연스레 묵직한 한 방을 먹인 이들이 죄다 경계인이거나 소수자라는 사실은, 스탠드업 장르의 파격은 무대매너나 소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제 이야기를 얼마나 신랄할 만큼 진실하게 선보일 수 있느냐에 달려있단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한다.



이 날 방송에서 가장 중요한 출연자로 홍보된 박미선의 무대 또한 그런 맥락에서 소중하다. 1988년 MBC <일요일 밤의 대행진> ‘별난여자’ 코너를 통해 이미 완성된 형태의 스탠드 업 코미디를 선보인 바 있는 박미선은, 본토를 의식한다거나 특별히 금기를 넘어야 한다는 강박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충실하고 담백하게 전달하는 것에 집중한다. 한국형 스탠드 업을 추구하는 모든 코미디언들과 KBS <스탠드 업> 또한, 박미선에게 더 많은 걸 배울 필요가 있다.

이승한 칼럼니스트 tintin@iamtintin.net

[영상·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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