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과 거리가 먼 ‘천문’을 ‘넷플릭스 감성’으로 변주했더라면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생강의 옆구리tv] 영화 <천문>은 장영실과 세종대왕 사이의 숨겨진 로맨스를 다룬 영화다, 라고 오해하기 딱 좋다. 최민식이 연기한 장영실의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동자를 보라. 한석규가 연기한 세종이 장영실을 바라볼 때의 눈이 가늘어지며 입가에 자연스레 배어나오는 미소를 보라. 근래에 ‘영실이’를 이렇게 로맨틱하게 부르는 영화는 없었다.

물론 실제로 <천문>은 중년 사극 퀴어 로맨스는 아니다. 세종 이도와 관노 출신 발명가 장영실의 신분을 뛰어넘은 우정과 충심을 다룬 영화다. 누구도 그것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영화는 그 메시지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 때문에 후반부에 <천문>은 장영실의 충심과 세종이 지닌 성군의 미덕을 보여주려 과하게 애쓴다. 어찌 보면 성공한 EBS 감성이기는 하지만 <천문>은 그 메시지를 붙잡기 위해 공들인 것들을 내려놓는다.



더구나 긴장감을 주기 위해 삽입한 미스터리 플롯은 생각보다 그리 흥미진진하지 않다. 그보다 매력적인 장면은 따로 있다. 장영실이 이도를 위해 한밤중에 먹물로 침전 출입문 창호지에 밤하늘을 그리고 구멍을 뚫어 별을 보여주는 장면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그 장면은 충정의 관계보다 자꾸만 로맨스 쪽으로 정서를 추측하게 만든다. 여기에 더해 세종은 또 장영실에게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감성 눈빛을 쏘아대기에 이르고……

하지만 영화는 끊임없이 로맨스의 떡밥을 던지면서도 결과적으로는 관객에게 지나치기 익숙한 성군과 충신의 메시지를 밀어붙인다. 그러다 보니 영화는 중반부에 이르면 지나치게 느슨해진다. 붕우유신, 군신유의 같은 삼강오륜 읽는 것 같은 교훈이 귓가에 가물대다 보면 어느새 눈이 감기고……



어쩌면 넷플릭스 시대에 <천문>은 너무 전형적인 인물에 고루한 교훈을 보여주는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영화가 지루해지는 틈마다 어느새 딴생각을 하며 점점 장영실과 세종의 이야기를 넷플릭스 스타일로 변주해 보게 된다.

아마도 가장 대중적인 코드는 장영실 천재 코드일 것이다. 물론 이때의 장영실은 소 같은 눈망울로 이도를 바라보는 충신이 아니다. 그보다는 답답한 유교 궁정을 실사구시의 정신과 영악한 잔꾀로 흔들어놓는 인물이라야 재밌겠다. 천재는 원래 좀 버릇이 없고 규칙을 뛰어넘어야 폼이 나는 법. 장영실이 버르장머리가 없으면 당연히 세종에 대한 태도 역시 다소 모순적이고 이중적일 수도 있다. 시대를 뛰어넘는 발명가 장영실이 꼭 시대의 윤리에 충실할 필요는 없다. 자유분방하고 거침없을수록 장영실은 빛이 날 것이다. 그러니까 조선왕조 사극이 아니라 넷플릭스의 세계라면 말이다.



사실 우리는 장영실을 그저 물시계와 측우기를 만든 조선시대의 발명가로만 알고 있다. 그 때문에 그에 대한 상상력은 사실 빈곤하다. 하지만 <천문>의 마지막 부분에 나왔듯 그는 곤장을 맞고 역사에서 사라진다. 어쩌면 장영실이 역사에서 사라질 만한 거대한 야심과 음모를 품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장영실의 그 풍성한 음모에 대해 우리는 좀 더 상상력을 품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장영실은 충분히 조선시대의 ‘레오나르도 다영실’로 변주가 가능한 인물인 것이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 넷플릭스 버전의 장영실이라면 아예 조선시대를 떠나도 상관없다. 어차피 곤장 맞은 이후 장영실의 삶은 기록에 없다. 희대의 발명가라면 해시계나 물시계가 아니라 타임워프 장비 정도는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기술 문명이 발달하지 않았다고?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조선시대의 무풍지대에는 온갖 기공요법과 도술, 암암리에 전해오는 비기가 있었을지 누가 알겠나. 그러니 물시계를 장착한 가마에 탄 장영실이라면 다른 시대로 떠날 수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등장하지 않아도 역시 넷플릭스의 조선시대라면 그럴 만하다.



하지만 역시 SF보다 <천문>에 가장 잘 어울리는 넷플릭스 변주는 퀴어 감성이다. 사실 넷플릭스의 많은 드라마들은 퀴어 감성을 대놓고 드러낸다. 세종이 영실이를 나직하게 부르는 <천문>에 몇몇 장면만 삽입하면 이건 뭐 넷플릭스에서 당장 퀴어물로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이다. 아니, 새로운 몇몇 장면이 없다 하더라도 조금만 조정하면 장영실이 고문을 당하며 세종에게 “역심을 품었다”는 대사가 애절한 사랑 고백으로 들리게 만들 수도 있다. 더구나 감독의 의도야 어찌 됐건 배우 최민식은 작정한 듯 장영실을 통해 그런 간절한 애정을 연기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그런데 <천문>을 보면서 자꾸만 딴 생각이 드는 것은 비단 영화의 중반 이후가 지루해서만은 아니다. 혹은 언젠가부터 영화관에 가기보다 넷플릭스를 돌려보는 시간이 더 많아져서도 아니다.



신하 장영실이 임금 세종에게 보여주는 그 진심어린 충심이 오히려 씁쓸하게 느껴지는 지점이 있어서다. 우리는 오너에 대한 충심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잘 아는 시대를 산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갑질에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는 소모품으로 산다. 자아가 있는 소모품 혹은 기생충의 시대, 이건 출생의 계급에 따라 살아가던 조선시대보다 어쩌면 더 서글픈 면이 있다. 그런 시대에 최민식과 한석규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의 골격이 여전히 충성의 미덕에 가깝다면, 이건 좀 민심과 거리가 멀어 슬픈 판타지다.

칼럼니스트 박생강 pillgoo9@gmail.com

[사진=영화 <천문>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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