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투영화 <파이터>가 전달하려는 이야기는?

[엔터미디어=오동진의 새영화가이드] 기타노 다케시가 일찌감치 이런 얘기를 했다. 그가 주연한 영화 <피와 뼈>에서의 극중 대사에서였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면 제일 먼저 갖다 버리고 싶은 것이 바로 가족이다. 하지만 또 그럴 수 없는 것이 가족이다’라고. ‘갖다 버리고 싶은’ 가족의 얘기를 또 한번 최신의 영화로 경험할 수 있다.

데이빗 O. 러셀 감독의 신작 <파이터>가 바로 그것이다. 짐짓 인간승리의 그렇고 그런 권투영화인 것처럼 폼새를 잡고 있지만 이 영화야말로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지긋지긋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영화가 아주 리얼하다. 먼 나라, 곧 매사추세츠 주 보스톤시 외곽의 전혀 딴 동네 얘기같지만 들여다 보고 있으면 바로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신기함이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웰터급 세계 챔피언을 꿈꾸고 있는 미키(마크 웰버그)는 이제 막 상승세를 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형 디키다. 디키는 한때 슈가레이 레너드와 멋진 승부를 보이며 촉망받는 선수였지만 마약중독자로 전락한 상태다. 게다가 지금은 감옥까지 갔다 온 상태다. 디키는 출감하자마자 엄마인 앨리스(멜리사 레오)와 함께 체육관을 들이닥쳐 이제부터는 미키의 트레이닝을 자신이 담당하겠다고 말한다. 미키와 디키, 엄마 앨리스, 그리고 미키의 선수생활을 올바로 잡아주고 있는 그의 애인 샬린은 곧장 대판 싸움을 벌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미키의 마음은 복잡하다. 두 사람만은 절대 안된다는 애인 샬린의 얘기에 공감하면서도 권투의 A부터 Z까지를 가르쳐 준 사람은 바로 형인 디키라는 점 또한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악다구니가 터져나오는 와중에 샬린과 미키의 대화가 귀에 들어 온다. 형을 받아들일까 말까 마음이 흔들리는 미키에게 샬린은 말한다. “어떻게, 당신이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 어떻게 당신이?” 미키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이렇게 한숨짓는다. “젠장할. 당신도 다른 사람과 똑같아.” 여기서 다른 사람이란 자신의 인생 전부를 쥐고, 흔들고, 못살게 군 엄마와 형을 두고 하는 얘기다. 그럼에도 뭘 어쩌겠는가. 엄마는 엄마이며 형은 형인 것이다. 다시 한번 형을 트레이너로 받아들인 미키는 샬린을 설득해 런던에서 열리는 세계 챔피언 타이틀전에 나가기로 한다.

대다수의 많은 권투영화들은 챔피언을 따기 위해 불굴의 의지와 투지를 휘날리며 훈련에 임하는 주인공의 땀과 고통을 중점적으로 부각시킨다. <록키>가 그랬다. 조금 다른 차원이기는 해도 <밀리언달러 베이비>도 영화의 상당 부분을 (애초부터 잘 안될) 선수를 키우고, 훈련시키고, 이기게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파이터> 역시 제목이 ‘파이터’인 만큼 그 같은 장르적 규칙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권투영화가 뭐 어쩌겠는가. 장르 비틀기를 한다 해도 그게 어디까지 또 얼마까지나 가능하겠는가. 애초부터 권투영화란 변별력을 갖기 어려운 장르영화다. 그래서일까. 시종일관 매니저인 엄마와 트레이너인 형, 6명 가까운 이복 혹은 친누나들, 그리고 아버지 등등과 이렇게저렇게 치고받으며 살아가는 노동자 가족의 애기가 얹히는 <파이터>는 늘 봐왔던 권투영화임에도 새로운 감각의 작품이라는 느낌이 들게 한다.



권투영화가, 20대 젊은 여성관객을 애초부터 포기해야 하는(여성들은 권투를 가장 싫어하는 스포츠로 꼽는다.), 투자제작면에서 비교적 ‘용감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것은 그 같은 이유 때문이다. 권투영화는 꼭 링 안의 승부만을 얘기하지 않는다. 링 밖의 세상, 링 안의 싸움보다 더 복잡한 인생의 정글을 얘기하기에 권투경기만한 기제도 별로 없다. 권투가 종종 드라마틱한 것은 순전히 몸으로 매를 맞아가며 돈을 버는 직업의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매를 맞고 돈을 버는 것은 인생사 전반에서도 같은 얘기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치고받는 혈투의 과정, 그 선상에 놓여 있다.

<파이터>에서 미키가 결국 챔피언에 오르게 되는 것은 권투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갔기 때문이 아니다. 노동자 가족으로서 겪어야 할 수많은 삶의 복병을 피해, 길고 구불구불하지만, 그래도 꼭 걸어야만 할 휘어진 길을 꾹 참고 달려갔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파이터’의 모습이다. 링위에서보다 링 아래의 사람과 제대로 싸울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승리를 할 수 있다. 궁극적인 승부는 링밖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다.

배우들의 연기가 불꽃을 튄다. 형 미키 역을 맡은 크리스챤 베일은 이래서 영화가 어쩌느니 저쩌느니 해도 배우의 예술이라는 점을 입증해 낸다. 크리스챤 베일을 보고 있으면 메소드 연기를 통해 캐릭터 안으로 스며들어가는 배우에게서 종종 광기가 발견된다는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이 느껴진다. 디키 역은 크리스챤 베일이 미치지 않고서는 저렇게까지 연기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카데미가 그에게 조연상을 줬지만 사실은 주연상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엄마 앨리스 역의 멜리사 네오도 ‘미친’ 연기에 있어 쌍벽을 이룬다. 평소의 공주 이미지를 벗기 위해, 그리고 이 영화의 배역을 위해 엄청 살을 찌운 에이미 아담스 그리고 마크 웰버그의 연기에도 찬사가 모아질 만하다. 무엇보다 이들의 주변을 방벽처럼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조연들의 연기는 <파이터>라는 굳건한 영화의 아성을 지켜냈다는 측면에서 오랫동안 기억돼야 한다. <파이터>는 배우들의 연기만으로도 충분히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있는가. 이기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한번은 이기고 싶을 것이다. 권투는 어쩌면 한방의 싸움이다. 권투처럼 우리 삶에서도 한방의 승부수를 가져가고 싶을 것이다. <파이터>는 우리들 마음 속의 그 같은 욕망을 대변하고 있는 작품이다.


칼럼니스트 오동진 ohdj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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