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세계’, 한 지붕 아래 사는 남남의 세계라는 건

[엔터미디어=TV삼분지계] ◾편집자 주◾ 하나의 이슈, 세 개의 시선.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대중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는 정석희·김선영·이승한 세 명의 TV평론가가 뭉쳐 매주 한 가지 주제나 프로그램을 놓고 각자의 시선을 선보인다. 엔터미디어의 [TV삼분지계]를 통해 전문가 세 명의 서로 다른 견해가 엇갈리고 교차하고 때론 맞부딪히는 광경 속에서 오늘날의 TV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는 단초를 찾으실 수 있기를.

영국 BBC One의 <닥터 포스터>의 한국판 리메이크 제목이 <부부의 세계>라는 점은 상징적이다. 선우(김희애)에게 일어난 일은 개인(‘닥터 포스터’)에게 일어난 개별적인 비극이라기보다는, 부부라는 관계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건의 가능성 중 하나에 가깝다. ‘피 한 방울 안 섞였음에도 자신이 가족으로 선택한 상대’인 부부는 그 특성 때문에 무엇보다 더 끈끈한 관계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 이유로 가장 낯설고 유해한 관계가 되기도 한다. 특히나 그 관계의 배타성이 상대의 동의 없이 훼손되는 불륜의 순간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TV삼분지계]의 평론가들은 <부부의 세계> 첫 방송을 어떻게 봤을까? 김선영 평론가는 외부의 시선에 민감한 선우가 꾸려온 세계가 온통 ‘일과 가정에서 모두 성공한 중년 기혼 여성의 완벽한 삶’을 증명하는 과시적인 소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며, 그런 완벽함을 유지해야 하는 책임조차 여성에게 지워지는 부부라는 관계의 불공정함에 주목했다.

반면 정석희 평론가는 선우 또한 자기 자신이 생각해 왔던 것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들을 짚으며, 그 세계를 지탱한 요소 중에는 선우의 자기기만도 있었음을 지적했다. 이승한 평론가는 태오(박해준)의 불륜을 의심하는 순간부터 태오의 불결함을 강조하는 연출이 전면으로 치고 나오는 대목을 통해 뻔히 눈에 보이는 것조차 눈 감아주게 만드는 결혼 생활의 다이나믹을 떠올렸다.



◆ 칼을 품고 거짓의 세상 앞으로

뜨거운 사랑이 의심으로, 다시 증오로 변하는 데는 며칠이 채 걸리지 않았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세계가 거짓이었음을 알게 된 뒤, 선우(김희애)의 삶은 통째로 흔들린다. 다정했던 남편의 눈길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고, 믿었던 이웃은 선우를 비웃고 있었으며, 절친했던 동료는 그녀가 무너지길 바라고 있었다. 어쩌면 아들도 완전한 선우의 편이 아닐지도 모른다. 남편 태오(박해준)의 생일날, 잔혹한 진실에 몸서리치던 선우는 등 뒤에 날카로운 흉기를 숨긴 채 거짓의 세계 앞으로 다가간다. 균열의 시작은 고작 머리카락 한 올 때문이었지만, 선우의 세계는 이미 진작부터 위태로웠다.

선우는 그동안 얼마나 장식적인 삶에 둘러싸여 살아왔는가. <부부의 세계>는 오프닝에서부터 이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햇볕이 잘 드는 자리의 리마인드 웨딩 사진, ‘존경하는 병원인’ 감사패, 남편의 ‘서울독립영화제 감독상’ 크리스탈 상패, 그리고 단정히 걸린 아들의 야구 유니폼까지, 선우의 집안은 ‘일과 가정에서 모두 성공한 중년 기혼 여성의 완벽한 삶’을 증명하는 과시적인 소품으로 가득 차 있다. 몇 번이나 거울을 보고 사진 속 얼굴이 ‘나이 들어 보이지는 않는지’ 묻는 모습 역시 선우가 외부의 시선에 민감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의미심장한 것은 선우가 남편의 외도 증거를 병원 안에서 발견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남편의 배신으로 인한 중년 여성의 위기를 그린 불륜 드라마들이 주로 ‘완벽한 아내와 엄마’의 역할에 헌신한 전업주부를 주인공으로 했다면, 이 작품은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 온 여성조차 얼마나 결혼의 관습에 얽매여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부부의 세계>는 ‘부부’라는 나란한 글자가 가리고 있는 불공정한 세계를 드러낸다.

김선영 칼럼니스트 herland@naver.com



◆ 모두가 선우를 완벽하게 속였다. 선우 자신조차.

열일곱 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홀로 당차게 자신의 앞길을 개척해온 지선우(김희애). 남편 이태오(박해준)의 고향인 고산시 가정사랑병원의 가정의학과 전문의이자 부원장이다. 첫 장면을 통해 선보이는 그의 삶은 완벽 그 자체다. 물론 그 혼자만의 생각이다. 실은 허점이 곳곳에서 보인다. 어색한 부분이 한 둘이 아니다. 리마인드 웨딩 사진이 한 치라도 비뚤어질까 신경 쓰는 이가 책상 위에 책을 놓을 때는 대충 던져두는가 하면 외출에서 돌아와 옷을 벗을 때도 바로 옷걸이에 걸지 않고 의자 위에 걸쳐둔다. 앞치마를 두른다지만 흰 실크 블라우스를 입은 채 갈비찜을 만드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1회만 봐서는 지선우는 일관성이 없는 인물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쇼윈도 식 일상이기 때문일까? 등장인물 소개에 따르면 ‘프로페셔널 한 직업정신에 따뜻한 감성으로 환자를 대하니 병원에서 인기가 날로 높아졌고 그 덕에 지역 토박이인 산부인과 전문의 설명숙(채국희)을 제치고 부원장 자리에 올랐다’라고 되어있다. 허나 지선우의 진료 장면은 프로페셔널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남편이 둘러준 머플러에 붙어 있었던 여자 머리카락에 신경이 쓰여 환자의 얘기에 제대로 귀 기울이지 못한다. 심지어 신정안정제 처방전을 가지고 남편 뒷조사를 부탁하는 부도덕한 거래도 서슴지 않는다.



“실망이네요, 선생님 같이 성공한 여자도 나 같은 여자와 다를 바 없다는 게.” 수면제 처방전을 받고자 이태오를 미행해준 바텐더 민현서(심은우)가 말했다. 남편의 의심스러운 행적을 바로 동료인 설명숙, 그리고 환자인 민현서에게 바로 털어 놓는 지선우. 이태오의 비서 장미연(조아라)이 아이들 앞에서 사생활을 아무렇지 않게 언급하는 것도, 지선우가 아들을 태우고 민현서를 만나 거래하는 것도 상식적이지 않다. 1회 마무리에 지선우가 탄식한다. ”모든 게 완벽했다. 나를 둘러싼 모두가 완벽하게 나를 속이고 있었다.” 하루 빨리 깨달았으면 좋겠다. 그 또한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정석희 TV 칼럼니스트 soyow59@hanmail.net



◆ 의심을 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부부의 세계> 1화 중 흥미로웠던 대목은 ‘불결함’이라는 감각이다. 선우(김희애)의 만류에도 태오(박해준)는 아직 냄비 안에서 익어가던 갈비찜 한 덩이를 집어 들어 입으로 가져간다. 쩝쩝거리는 소리가 모든 사운드를 지배하고,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던 주방 대리석 상판 위에 태오가 흘린 갈비찜 국물이 뚝뚝 떨어진다. 원작 <닥터 포스터>에는 없던 이 장면은 시각과 청각을 모두 동원해 불결함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연출은 태오가 정결한 선우의 세상을 침범해 훼손하는 존재라는 걸 쩌렁쩌렁 웅변한다.



이전까지는 말끔하던 태오가 갑자기 돌변해 더러운 사람이 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원래도 태오는 해외 출장에서 돌아와 비에 흠뻑 젖은 몸을 씻지도 않은 채 침대 안으로 파고들어 그대로 선우와 몸을 섞을 만큼 위생관념과는 크게 인연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선우가 태오를 의심하기 전에는 그 모든 것이 낭만적인 충동의 결과물처럼 그려졌다. 선우가 태오의 행동을 그와 같은 시선으로 이해하며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선우가 태오의 진심을 의심하기 시작한 뒤에야,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선우가 안간힘을 다 해 꾸려왔던 안전하고 정갈한 세상을 시나브로 오염시키는 것이었다는 사실이 화면 위에 암시된다. 어떤 것들은 관계의 뿌리까지 의심하는 순간이 되어야 보이는 법이다.

어떤 이들은 아직도 배우자의 외도를 눈치채지 못한 피해자를 탓하곤 한다. 바람을 피운 사람도 문제지만, 살을 맞대고 사는 상대가 밖으로 도는 걸 눈치 못 챈 사람의 무심함도 문제라는 식의 양비론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상대의 자명한 단점도 보이지 않게 감추는 힘이 있다. <부부의 세계>는 원작 <닥터 포스터>가 밟아온 길을 충실히 따르며, 함께 살면서도 상대를 다 모르는 부부라는 관계의 다이나믹을 탐구한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알 수 없어서 더 무서운, 지붕 아래 사는 남남의 세계를.

이승한 칼럼니스트 tintin@iamtintin.net

[사진·영상=JTBC, 그래픽=이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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