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세계’, 단순한 불륜드라마가 아닌 이유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생강의 옆구리tv]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는 남녀의 불륜에 관한 흔한 드라마는 아니다. 오히려 부부라는 사회적 계약관계와 그 믿음의 훼손에 관한 이야기에 가깝다. 주인공 지선우(김희애)는 성공한 가정의학과 부원장이다. 그리고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그녀에게 일터와 가정 모두 약속으로 묶여 있는 공간이다. 물론 일터가 사회적 나를 위한 공간이라면, 가정은 좀더 사적인 나를 위한 곳이다. <부부의 세계> 첫 회 지선우는 이 두 개의 영역에서 모두 성공한 인물로 묘사된다. 일터와 가정, 두 개의 영역에서 우아한 밸런스를 유지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런데 <부부의 세계>는 배우자의 불륜 탓에 주인공의 밸런스가 무너지는 순간으로 곧바로 파고든다. 만약 남편의 세계였다면 분노에 눈이 멀어 아내와 불륜남을 살인하는 스릴러로 흘러가는 플롯을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성공한 아내의 세계는 좀 다르다. 지선우에게는 사랑하는 아들 이준영(전진서)이 있다. 그녀를 지켜보는 수많은 친구와 지인들의 눈도 있다. 달콤한 와인잔이 독이 든 잔으로 바뀌었지만 지선우는 함부로 그것을 깨트릴 수 없다. 민낯이 드러났어도 생니를 드러내며 상대를 공격하는 대신, 그 감정을 감추기 위해 우선 다른 방식의 화장이 필요하다.



이 복잡한 심리의 결 때문에 <부부의 세계>는 흔한 불륜드라마와는 다른 방식으로 풀려나간다.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일극이나 주말극에서 흔히 보여주는 불륜드라마로 오해할 소지도 상당히 크다.

다행히 <부부의 세계>는 첫 주 1, 2회를 통해 이런 오해를 피해가는 데 성공했다. <부부의 세계>는 겉보기에 부족할 것 없는 지선우의 삶이 남편 이태오(박해준)의 불륜을 알아가면서 무너지는 순간들을 심리적 긴장감 속에 보여준다. 그러면서 첫 회 마지막에 지선우는 남편 이태오의 비밀 스마트폰을 발견하면서 모든 비밀을 알아차린다. 남편의 불륜은 이미 예상했던 것, 하지만 지선우는 주변의 지인들이 모두 남편의 불륜을 알고 있으며 은연중에 그 비밀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인생이란 무대에서 성공한 주인공이 자기도 모르게 타인의 웃음거리 피에로로 추락해 버리는 순간이라니.



<부부의 세계>는 2회에서 지선우가 무너진 삶을 수습하기 위해 최대한 이성적으로 애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들과 지금의 삶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민낯을 보여준 이태오를 용서하려 애써본다. 하지만 삶이 폐허가 된 민낯의 지선우와 달리 민낯의 이태오는 누구보다 비굴하고 뻔뻔하다. 모든 사실을 말하면 용서한다는 아내 앞에서 여자는 너뿐이라며 거짓을 연기하는 이태오의 장면은 그래서 어느 스릴러보다도 섬뜩하다.

이처럼 <부부의 세계>는 밀도 있는 긴장감과 심리묘사, 확실하고 빠른 서사로 흔한 불륜 드라마와 다른 품격을 첫 주에 보여주었다. 하지만 배우 김희애의 지선우가 아니었다면 <부부의 세계>는 지금보다 훨씬 더 평범한 드라마로 다가왔을 것이다.



김희애는 병실에서 남편의 불륜녀 여다경(한소희)을 진료하고 채혈하는 장면만으로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낼 줄 아는 배우다. 하지만 비단 이 때문에 김희애가 다시 보이는 것은 아니다. 김희애는 <부부의 세계>를 통해 한 번 더 그녀를 갱신했다.

사실 김희애는 교과서적인 모범배우의 전형적이었다. 어떤 감정이든 극 안에서 정확하게 보여줄 수 있지만, 그 때문에 그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하기 어려운 느낌이기도 했다. 특히 인간의 계산되지 않은 감정들을 연기할 때 김희애는 허덕이거나 과잉된다는 인상을 주었다. 특히 김희애의 전작이었던 <끝에서 두 번째 사랑> 같은 평범한 로맨스물에서 그녀는 무언가 겉도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랬다, 로맨스란 계산되지 않은 감정일 텐데, 그 감정의 포인트를 그녀는 잡아내지 못했다.



이후 김희애는 스크린을 통해 자신의 연기 세계를 넓혀간다. 작은 영화지만 의미 있는 영화에서 대중들은 드라마퀸 김희애가 아닌 또 다른 김희애를 만날 수 있었다. 실화에 바탕을 둔 위안부들의 소송 이야기인 <허스토리>, 여성 퀴어 로맨스를 담담하게 담아낸 <윤희에게>가 그녀의 선택이었다. 두 영화에서 김희애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위해 목소리를 드높이는 문정숙 사장과 첫사랑의 비밀을 안고 살아가는 담담한 윤희를 연기한다. 하지만 이 두 캐릭터 모두 드라마에서 보던 극적인 주인공이 아닌, 현실의 사람들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선 느낌이었다.

이 작품들 이후 김희애는 다시 <부부의 세계>로 드라마에 복귀했다. 김희애는 여전히 드라마의 긴장감과 서사를 잡아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 어떤 장면에 울고, 웃고, 숨을 참아야 화면에 몰입되는지 귀신같이 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녀가 과거에 하지 않던 방식의 연기와 표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본인의 진료실에서 여다경의 임신 사실을 확인한, 지선우는 여다경을 바라본다. 그때 배우 김희애의 얼굴에는 무언가로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미묘한 슬픔과 분노, 허망함이 아주 짧게 스쳐간다. 어떤 감정이건 놓치지 않는 연기가 아니라, 많은 감정들을 뒤섞어 아주 잠깐 보여주었다가 그대로 흘려보내는 식이다. 이것은 김희애의 예전 방식이 아니었지만, 이 드라마가 김희애의 드라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부부의 세계>는 앞으로의 이야기도 궁금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김희애의 노련하면서도 신선한 연기가 어떠할지 궁금해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칼럼니스트 박생강 pillgoo9@gmail.com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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