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영석 PD와 유홍준 교수, 다른 코너에서 만났으면

[엔터미디어=정석희의 TV 돋보기] 서울에서 태어나 반백년 넘게 살아왔지만 인근만 뱅뱅 돌며 살았을 뿐 안 가본 곳이 태반인 나. 서울 여행객의 필수 코스라는 63빌딩 전망대도 올라가볼 생각을 못 했고, 한강 유람선도 타보지 못했고, 서울을 둘러싼 명산들도 몇 군데 못 가봤다. 그렇지만 조선 왕조 600년의 역사가 담긴 경복궁만큼은 얼추 열 번 이상은 갔지 싶다. 왜냐하면 아이 둘을 키웠으니까. 역사와 문화에 조예가 깊은 아이로 길러내겠다는 사명감이었든 방학숙제 때문에 억지춘향으로 간 것이든, 아이 어릴 적에는 매년 한 번씩은 꼭 갔다. 그것도 그냥 슬렁슬렁 지나친 것이 아니라 건축물 앞에 비치된 안내판 문구를 공책에 빼곡히 옮겨 적기도 했고 인증 샷을 남겨 놓기도 했다. 지금처럼 인터넷을 통해 모든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러나 문제는 머리며 마음에 남아있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이 아닐는지. 지난 주 KBS2 <해피선데이> ‘1박 2일’이 마련한 ‘경복궁 7대 숨은그림찾기’에서 유홍준 선생이 설명하신 바에 따르면 경복궁의 건축물과 단아하면서도 수려한 조각은 단순히 멋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에 철학과 신화가 담겨 있다지 않나? 심지어 우리가 밟고 지나쳤던 돌들도 그저 보도블록의 역할이 아닌 과학적인 배수시설이었고, 경회루 연못 위 두개의 작은 섬조차 원활한 물 순환을 위해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이란다. 그처럼 예술과 과학이 균형 있게 공존하는 완벽한 건축물이었거늘 아이를 데리고 다닐 당시에는 솔직히 감탄은커녕 내심 북경 자금성에 비하면 왜 이리 규모가 초라한가, 뭐 이따위 생각이나 했었으니 원. 그리 하찮은 식견을 지닌 어미에게 끌려 다닌 아이가 뭘 제대로 보았을 것이며 무엇이 기억에 남았겠는가. 부끄럽고 또 부끄러운 일이다.

지난 해 유홍준 선생께서 MBC <황금어장> ‘무릎팍 도사’에 나오셨을 때, 폭우가 쏟아지는 날 경복궁 근정전 앞 박석 사이사이로 흘러내리는 빗물이 그렇게 아름답다는 말씀을 해주셨을 때, 그때도 숱하게 그 박석을 밟았으면서 어째 그 좋은 걸 놓쳤나 싶어 언젠가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면 꼭 한번 달려가 보겠노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게으름으로 인해 실행으로 옮기진 못했고 대신 선생의 신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6권 ‘인생도처유상수’에 경복궁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하여 당장 구입해 읽었었다.

사실 근정전 박석이 지닌 절묘함은 물론, ‘경복’과 ‘근정’의 참뜻이며 교태전 뒤편 아미산 꽃동산의 십장생 굴뚝, 경복궁 건축의 꽃 경회루의 액자 얘기 등, ‘1박 2일’ 멤버들이 찾아 나섰던 ‘경복궁 7대 숨은그림찾기’의 내용이 책을 보면 다 들어 있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의 조화로움을 촌철살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유머까지 곁들여 풀어낸 선생의 필력에 감탄하며 하루도 채 안 돼 독파했었건만, 웬 걸. ‘1박 2일’에서 선생이 퀴즈를 내시는데 가물가물 생각이 통 안 나지 뭔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선생이 저서에 인용하신 글귀처럼 아마도 크게 애정이 없었기에 제대로 보고 느끼지 못했지 싶다.







더구나 나는 90년대 중반 선생께서 전국적인 답사 신드롬을 불러일으키셨을 때 저자와 함께 하는 답사 여행을 따라 나선 경험도 있다. 평범한 듯, 사소한 듯 보이는 돌 하나, 나무 하나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선생의 빼어난 능력은 두고두고 일행들 사이에서 화제였는데, 여럿 사이에 섞여서 들은 탓일까? ‘1박 2일’에서처럼 설명에 온전히 몰입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게 바로 TV가 갖고 있는 힘일지도 모르겠다. 1대 1 개인교습처럼 눈과 눈을 마주하는 설명이 가능하니 말이다. 하기야 우리가 TV를 통해 알게 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다못해 조선시대 임금의 거처가 강녕전이요, 왕비의 거처가 교태전이었다는 것도 사극에서 들어 알게 된 것들이지 않나. “중전 마마, 주상 전하께서 지금 교태전으로 오고 계시다 하옵니다.” 이런 식의 대사, 기억들 나실 거다.

어쨌거나,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망인가? ‘1박 2일’도 막을 내리는 마당에 나영석 PD가 유홍준 선생을 모시고 우리 문화재 교육을 위한 프로그램 하나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역사와 문화에 무지한 은초딩에게 우리 것의 소중함과 역사의 깊이를 깨우쳐주는 콘셉트라면 어떨까?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freechal.com
그림 정덕주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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