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우진의 잡학시대] “정이란 것이 그런 겁디다. 아무리 단속을 해도 모기장에 모기 들어오듯이, 세 벌 네 벌 진흙 처바른 벼락박에 물 새듯이 그렇게 생깁디다.”

한창훈 소설집 <나는 여기가 좋다>에 나오는 말이다.

벼락박은 가끔 쓰이는 단어지만 사전에는 오르지 못했다. ‘벽’임은 확실하다. ‘벼락박에 x칠할 때까지’라는 관용어구에서도 알 수 있다. ‘벼락박’이라고도 하고, ‘벼랑박’이라고도 한다.

벼락박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 한 인터넷 포털의 오픈사전에는 다음과 같은 벼락박 설명이 올랐다. ‘낭떠러지를 뜻함. 단순히 벽을 뜻하는 말로 주로 쓰임.’ ‘벼락’에서 ‘벼랑’을 연상하고 낭떠러지로 연결한 듯하다. 나는 이 풀이에서 ‘낭떠러지’ 부분에 동의하지 않는다.

답을 찾는 실마리는 아래와 같은 발음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__ 거품 → 버끔
__ 어리숙 → 어수룩
__ 국물 → 멀국
__ 직접 → 집적
__ 손톱깎기 → 손톡깝기

우리가 흔히 듣는 앞뒤 음소가 뒤바뀌는 현상이다. 발음이 뒤바뀐 오른편 단어의 일부는 사전에 등재됐다. 손톡깝기는 내가 ‘집적’(?) 개인적으로 접한 사례다.

벼랑박도 그런 단어다. ‘벼랑박’은 ‘바람벽’에서 비롯됐다. 모음이 자리를 바꾸고 ㅁ 받침의 발음이 변했다. ‘바람벽’ ‘벼람박’ ‘벼랑박’ ‘벼락박’으로 바뀌었다.

바람벽(壁)은 사전에 나온다. ‘방을 둘러 막은 둘레’라고 풀이됐다. ‘바람벽’은 ‘바람’과 관련이 있나? 풀지 못한 채 남겨뒀던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최근에 찾았다.

심재기는 <국어어휘론신강>에서 ‘바람벽’ ‘생강’ 등을 함께 설명했다. 생강(生薑)은 우리말 ‘새앙’과 같은 뜻의 한자 ‘강(薑)’이 합쳐진, 말하자면 반복 단어다. ‘새앙강’이라고 하다가 ‘생강’이 됐고, ‘생’에도 한자를 달아 生薑이 됐으리라.

바람벽 역시 뜻이 같은 우리말 ‘바람’과 한자 ‘벽’이 결합한 단어다. 옛날에는 ‘바람’이 ‘풍(風)’ 외에 ‘벽’도 가리켰다는 말이다. 이는 국립국어원의 인터넷 표준국어대사전(http://stdweb2.korean.go.kr)에서 찾아보면 확인된다. 바람은 ‘벽의 황해도 방언’이라고 나온다. 심재기는 두 ‘바람’ 가운데 ‘풍’을 지칭하는 바람은 그대로 두고, ‘벽’을 뜻하는 바람은 ‘바람벽’으로 바꿔 부르며 구분했으리라고 추정한다.

‘벼락박’은 벼랑이나 낭떠러지와 아무 관련이 없다. ‘바람벽’은 바람을 막는 용도가 아니다.


칼럼니스트 백우진 중앙일보시사미디어 전문기자, <안티이코노믹스><글은 논리다> 저자 cobalt@joongang.co.kr


[사진=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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