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남편들은 왜 아내의 ‘한류팬질’을 용납할까

[서병기의 대중문화 트렌드] 일본 남규슈(南九州)의 가고시마현을 2박3일간 다녀왔다. 2월말인데도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바람은 춥게 느껴지지 않았고 시원하거나 따뜻했다. 가고시마의 최남단에 있는 이부스키는 지하의 온천수에 의해 달궈진 해변의 검은 모래로 몸 전체를 묻어주며 천연모래찜질을 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한국으로 치면 해남 땅끝마을 정도 되는 위치다.
 
지금도 화산활동으로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는 사쿠라지마 활화산도 볼 수 있다. 원래 섬이었지만 화산 활동으로 육지와 연결됐다. 이 통로로 북쪽으로 조금 더 가면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의 주인공이자 일본 근대화의 영웅으로 일컬어지는 사카모토 료마가 19세기 중엽 신혼여행을 갔던 기리시마 온천이 있다. 료마는 일본에서 온천으로 신혼여행을 간 첫 번째 인물이다.
 
사카모도 료마는 가고시마에서 메이지 유신 3걸 중 한 사람인 사이고 다카모리를 만난다. 료마가 일본인에게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사쓰마 번(가고시마)을 이끌던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 번(야마구치)의 수장 기도 다카요시간의 동맹(샷조동맹)을 주선했기 때문이다.<번(藩)은 제후가 통치하는 영지를 말한다> 두 무사는 원래 앙숙이었지만 료마의 중재로 힘을 합치게 돼 봉건적인 도큐가와 막부 체제를 종식시키고 근대의 시작인 왕 중심의 새로운 통일정권를 탄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가고시마는 일본 최남단의 작은 고장임에도 사이고 다카모리와 그의 친구 오쿠보 도시미치 등 메이지 유신의 3걸중 무려 2명을 매출한 고장답게 자부심이 대단했다. 특히 가고시마 시 곳곳에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메이지 신정부의 요직에서 일하다 정한론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귀향, 후진을 양성하다 중앙정부와 세이난 전쟁을 일으켜 자결했다고 한다. 어디까지 믿어야 될지 모르지만 그가 자결했다는 동굴도 있었다.
 
결국 메이지 유신 3걸인 사이고, 오쿠보, 기도 다카요시가 모두 죽자 이미 조슈번의 실권을 장악했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메이지 신정부의 실세로 부상하며 초대 내각대신이 됐고 무리한 조선강제합병을 추진하다 조선 독립운동가 안중근에게 총을 맞고 죽었다. 어쨌든 일본 메이지 신정부를 이끈 오쿠보 도시미치와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이 세상 물정에 어두울 때 이미 행정 제도나 화폐제도 등 신문물을 익히기 위해 구미 등지로 시찰을 나가 배워왔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할 것 같았다.

가고시마의 셀링포인트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사쿠라지마 활화산, 두 가지로 요약됐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일본남자의 평균 신장이 145㎝ 정도였던 당시 180㎝가 넘는 거구였으며 부리부리한 눈이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느끼게 했다. 사쿠라지마는 지금도 연기를 뿜고 있고 화산재를 날리게 하고 있으니 누구나 신기하게 바라본다. 하지만 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접으면 가고시마 여행의 재미가 반감될 정도였다.

가고시마를 여행하며 만나는 그 지역 사람마다 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해 질문하면 대화가 활기를 띤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와타나베 켄이 연기한 사무라이 대장 가쓰모토 영주가 사이고 다카모리를 염두에 두고 쓰여졌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지만 사이고 다카모리의 스토리텔링은 외지인이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였다. 사실 나의 호기심은 연예기자로서 한류에 관한 것이었다. 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한 스토리는 현지에서 나에게 채워준 이야기다.

나는 가고시마 같은 시골에서 한류가 어느 정도 체감되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한류를 취재했지만 거의 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 사람들에 국한됐다. 시골이다보니 아무래도 나이 든 사람들이 많았는데, 온천과 호텔, 식당 등에서 만난 이 고장 중년 여성들도 배용준, 장근석, 카라에 대한 이야기에 큰 관심을 보였다.
 
욘사마야 이미 일본에서 전국적으로 알려진 유명인이 되었지만 장근석의 명성도 기대 이상이었다. 일본 중년 여성들이 요즘 새롭게 좋아하는 대상이 장근석이라고 했다. 장근석에게 말도 안되는 이상한 기사가 나오는 것도 유명세라고 했다. 후지TV가 한국 드라마를 매일 방송해 일본에서 공적으로 떠올랐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이 아줌마들은 드라마 ‘미남이시네요’의 재방송 보는 게 즐거운 일과라고 말했다.
 
한국드라마의 인기에 대해 요시모토흥업(吉本興業)의 오사키 히로시 사장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솔직히 한국 드라마는 일본 과거 드라마의 패턴이다. 젊은이들에게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것이고,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과거를 생각나게 하는 추억의 대상이다 보니 인기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일본에서 만난 중년 여성과 여행가이드에게 들었던 내용과는 약간 다르다. 한국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 일본 중년 여성들의 가슴을 뛰게 한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50대 이후 오래 사는 방법은 크게 3가지다. 첫째는 소식(小食)과 운동이다.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지키기는 너무 어렵다. 두 번째는 첫 번째 원칙을 지키기 어려우니 면역력을 강화해준다는 키토산 등을 지니고 다니면서 장복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가슴을 뛰게 하는 대상, 즉 사랑을 찾는 것이다.

피를 끓게 하는 사랑은 혈액순환을 왕성하게 해 자연히 건강해진다. 사랑이 건강의 원동력이다. ‘욘사마’와 ‘근짱’은 일본 중년 여성들을 젊게 해 준다는 점에서 돈을 지출하고 한국까지 오는 ‘팬질’도 남편이 허용해준다는 설명이다. 이 아줌마들은 숨만 쉬고 사는 연명수명보다는 셀렘의 대상이 있고, 가슴을 뛰게 하는 대상이 필요하다고 했다. 남자와 여자 모두 외모에 관한 한 한국이 일본보다 낫다는데 일본인들도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한류스타의 이 역할은 충분히 그럴듯하게 들린다.
 
실버타운에서도 입술을 빨갛게 칠하며 할아버지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할머니가 오래 산다고 한다. 또 실버타운에서 노인들끼리만 살게 하기보다는 유치원과 연계해 아이들과 교류하는 노인들의 마음이 더 젊어진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장근석이나 배용준이 일본 중년 여성들에게 엄청나게 큰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럼니스트 서병기 < 헤럴드경제 선임기자 > wp@heraldm.com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