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달한 로맨스에 왜 권모술수가 많이 나올까?

[엔터미디어=정석희의 TV 돋보기] 나는 영화 관람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편이다. 이유는 별 건 아니고 단지 모함이나 음모에 극도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인데 이런 증세에도 무슨 증후군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려나? 증세인즉 누가 뭔가 술수를 부리기 시작하면, 그리고 누군가가 눈치 없이 거기에 걸려들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 순간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어진다는 거다. 아무리 눈을 질끈 감아봤자 들리는 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는지라 옆 사람이 눈치 채지 않게 슬며시 귀를 막아보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손가락 틈을 타고 고스란히 흘러들어오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다른 관객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는 일, 울며 겨자 먹기로 앉아 있으려니 죽을 맛이지 뭔가. 해피엔딩을 맞으리란 걸 불을 보듯 안다손 쳐도 왜 그리 조마조마 애간장이 타는지 모르겠다.

따라서 시작부터 끝까지 악행이라곤 절대 없으리라는 확신이 설 경우에만 당당히 극장을 찾게 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TV는 얼마나 편리한가. 눈 뜨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면 리모컨이 한방에 해결을 해주지 않나. 식구들과 같이 보고 있을 때라면 슬며시 일어나 화장실에를 다녀오던지 설거지를 하던지, 뭔가 딴 짓을 하다 돌아오면 되는 일이다. 성향이 이렇다보니 시트콤이나 달달한 소재의 드라마들을 즐겨 볼 수밖에 없는데 최근 들어 취향에 꼭 들어맞는 드라마들이 대거 쏟아져 나오는 통에 내심 쾌재를 불렀었다.

그런데 웬 걸, 함정이며 권모술수가 요즘 드라마의 필수요소인 걸까? 권력을 사이에 둔 모함과 암투야 유사 이래 끊임없이 이어져 온 일인지라 정통 사극을 비롯한 역사 드라마에서는 그러려니 하고 포기를 하지만 로맨틱 코미디 풍의 드라마에서조차 왜 굳이 과하다 싶은 험한 꼴을 보고 들어야 하는지. 긴장이나 갈등이라는 첨가제가 극을 좀 더 흥미롭게 만드는 장치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사람의 도리를 벗어나 인륜을 거스르는 상황 전개는 어째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일례로 SBS <패션왕>에는 구태의연하기 짝이 없는 악녀가 하나 등장했다. 조마담(장미희)이 주인공 이가영(신세경)을 괴롭히는 방식은 장학금을 거절하는 편지를 대신 써 보낸다거나 얼토당토않은 누명을 뒤집어씌우는, 신데렐라에 나오는 계모나 할 법한 악행들이지 뭔가. 앞으로 어찌 달라질지 몰라도 현재까지는 시대를 비켜가는 언행이다 보니 주인공의 성공 스토리를 위해 억지로 구겨 넣은, 과거로부터 초대된 인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살생과는 무관한 악행, 그나마 귀여운 구석이 있는 악녀라 하겠다.











SBS <옥탑방 왕세자>에서 화용(김소현)은 자신이 바라던 세자빈 간택 단자를 동생 부용(전민서)이 올리게 되자 이를 질투하다 못해 화로에 달궈진 인두로 동생 얼굴을 지지는 살 떨리는 악행을 서슴지 않으니 말이다. 더 가슴 서늘한 건 시공을 초월한 300년 뒤에도 의붓자매 사이로 만나 또 다시 핍박을 반복한다는 사실. 새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어린 동생을 유기해버린 지난날의 죄과를 후회하기는커녕 멀리 미국에서 십여 년 만에 찾아온 박하(한지민)에게 알아서 눈치껏 인연을 끊어주길 바란다고 말하는 홍세나(정유미)를 보고 있자면 앞으로의 행보가 두렵지 않을 수 없다.

생수병을 열지 못해 쩔쩔매는가 하면 TV 화면 안에서 화살을 겨누는 무사의 모습에, 전기밥통에서 흘러나오는 여자 목소리에 대경실색하는 왕세자(박유천) 일행을 마냥 웃어가며 볼 수가 없으니 아쉽지 않은가.

하지만 이건 또 약과다. <더킹 투하츠>에서 이미 어린 시절 왕제 이재하(이승기)에게 무차별 폭행을 가한 전력이 있는 김봉구(윤제문)는 자신에게 모든 재산을 상속한다는 양아버지의 유언장을 손에 넣자마자 혹시라도 마음이 변할까봐 그 즉시 약물을 주입해 양아버지를 살해하지 않나. 그리고 이어지는 섬뜩한 마술쇼와 무참한 보복 폭행들은 보는 이의 마음을 불안에 떨게 만든다.

돈과 권력을 쟁취한 그가 왕실과 이재하에게 엄청난 위해를 가할 예정임이 익히 짐작이 가고 남기에. 날라리 왕제 이재하와 북한 특수부대 교관 김항아(하지원)가 벌이는 갖가지 좌충우돌 에피소드들 또한 마음 편히 웃으며 볼 수만은 없는 상황인 것이다. 마치 시한폭탄을 옆에 둔 기분이랄까? 진도는 불과 2회가 나갔을 뿐인데 언제까지 이 극한의 긴장감을 안고 가야하는지. 하루도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없는 뒤숭숭한 요즈음, 부디 드라마에서 만큼이라도 훈훈한 주인공들이 펼치는 달달한 로맨스를 별 고민 않고 지켜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freechal.com
그림 정덕주


[사진=SBS,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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