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비> 윤아, 용도 폐기된 청순 캐릭터 되살릴까?

[엔터미디어=배국남의 눈] 담쟁이 넝쿨, 벤치, 소설 <어린 왕자>, 영화 <러브스토리>, 노래 <우리들의 이야기>… 26일 첫 방송으로 베일을 벗기 시작한 윤석호PD의 KBS 월화 드라마 <사랑비>는 1970년대의 기표들로 넘쳐났다. 그리고 그 기표의 기의는 1970년대의 순수하고 지순한 사랑이다. “그녀로 행복했고 그녀로 슬펐다” 인하(장근석)의 대사 속 그녀는 그 지순한 사랑의 주역이다. 그녀는 남성들의 로망이자 청순한 사랑의 표상인 긴 생머리의 윤희(윤아)다. 윤희는 첫 회부터 시청자에게 은은하지만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녀는 진실한 사랑, 지순한 사랑의 상실시대에 긴 생머리를 하고 찾아왔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우리 드라마와 영화를 강타한 것이 바로 지순한 사랑을 하는 여성이었다. 드라마나 영화뿐만 아니다. 현실에서도 그랬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현실의 고단함이 순수한 사랑을 압살하던 때도 사람들 가슴속 한켠에는 지순한 사랑을 그리워하고 갈망했다. 그래서 여전히 드라마 속 청순한 사랑의 여자 주인공은 시청자의 사랑을 받았다.

이 때문에 여자 스타화의 첩경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청순한 이미지를 견지하며 지순한 사랑을 하는 캐릭터를 맡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청순하고 지순한 이미지의 여자 연예인은 대중, 그것도 남성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으며 스타로 화려하게 부상했다. 긴 시간 청순한 이미지는 스타화의 보증수표 역할을 한 것이다. 이영애 최지우 송혜교 손예진 김하늘 등 적지 않은 여배우들이 맑고 청순한 이미지로 스타로 비상했다.

하지만 무한 경쟁과 자본의 위력이 현실을 압도하면서 사랑은 물적 토대라는 외형적 조건의 만남의 등가물이 된 시대에 접어들었다. 현실에선 사랑이라는 단어는 조건 좋을 때만 나오는 말이고 힘들고 어려워지면 사랑은 사라지는 편리한 일회용 인스턴트로 전락했다. 그리고 남녀 차등권력의 시대에서 남녀 동등권력 시대로의 전환,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과 주체성 발현, 남녀 성역할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본격화했다.

시대와 현실, 그리고 인식의 변화는 지순하고 청순한 사랑을 비현실적이며 청승맞은(?) 사랑으로 퇴색시켰고 긴 생머리로 표상되는 지순한 여성을 남성에 순종하는 수동적 여성상으로, 현실과 시대에 뒤떨어진 답답한 여성상의 상징으로 전락시켰다. 남녀간의 사랑에 있어서도 지고지순하며 희생적인 사랑이 사라지고 이해와 조건을 따지고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는 남녀관계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급변한 현실과 세태는 드라마와 영화 속에 그대로 밀려들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청순한 여성 캐릭터는 구시대의 유물이 됐다. 지고지순하고 희생적인 여성 캐릭터가 유효성을 상실 한 것이다. 외모, 재산, 학벌, 직업, 연봉 등 스펙으로 대변되는 조건들이 남녀 간의 만남에 우선시되는 불편하지만 적나라한 현실 앞에 맑고 지순한 사랑을 하는 드라마 속 여자 주인공은 더 이상 눈길을 끌 수 없는 진부한 존재에 불과했다.



대신 중성적이고 적극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청순한 여성을 밀쳐내며 대세로 자리 잡았다. 드라마와 영화에는 가난한 환경과 힘든 상황에서도 일과 사랑에 당당한 캔디녀에서 부터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이나 섹시한 이미지의 여성 캐릭터들로 넘쳐났다. 그리고 청순한 이미지는 스타덤의 첩경이라는 공식이 깨지며 지순한 이미지의 여자 스타들이 브라운관에서 그리고 스크린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순한 이미지로 스타로 부상한 여배우들 마저 청순한 이미지를 탈색했다.

그런데 오랫동안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용도 폐기된 긴 생머리의 청순한 여배우가 2012년 3월26일 시청자 앞에 다시 나타났다. 1970년대 아날로그식 순수한 사랑과 2012년 디지털식 트렌디한 사랑의 두 빛깔을 보여줄 <사랑비>에서 윤아가 진부한 캐릭터로 여겨지는 지순한 캐릭터, 김윤희의 옷을 입은 것이다. 물론 2012년 시대로 접어들면 쾌활하고 명랑한 인물, 정하나로 바뀌지만 말이다.

<사랑비> 연출자 윤석호PD는 자신했다. “<사랑비>는 맑고 지순한 사랑이 한축이다. 최근 들어 젊은 배우 중 맑고 지순한 사랑에 부합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어졌다. 요즘 당당하고 중성적 이미지의 젊은 여자 배우는 많은데 청순한 이미지의 배우는 없다. 윤아는 바로 <사랑비>의 김윤희 캐릭터에 맞는 맑고 지순한 사랑을 펼칠 수 있는 외모와 이미지를 갖고 있는 배우다. 윤아는 남성들의 로망이지만 사라져가는 여성적 이미지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촬영을 하면서 이 같은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윤아는 과연 시대와 현실이 변하고 그 변화를 담보한 드라마와 영화에서 추방당한 청순한 여성 캐릭터를 부활시킬 수 있을까. 일회용 사랑이 난무하고 조건과 조건의 만남이 사랑으로 치환되는 현실에서 진정 지순한 사랑의 본질을 드러내 시청자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사랑비>의 또 다른 볼거리이자 <사랑비>를 의미 있게 해독할 수 있는 하나의 단초다.


대중문화전문기자 배국남 knbae@entermedia.co.kr


[사진=와이트리미디어, KB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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