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용도, 대조도 없이 1

[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사실을 다루고 주장을 펴는 글의 기본이 ‘인용’과 ‘대조’임을 새삼 배우고 있다. 이 두 가지 원칙을 지키지 않은 글이 자주 눈에 띈다.

트집 잡기 좋아하는 성향인 데다 남의 오류를 잘 잡아내는 눈썰미를 발달시키게 된 내 탓 만은 아니라고 본다. 사실 전달 방법의 기초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게 된 풍토가 그보다 더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인용하지 않고 대조하지 않은 채 쓴 글을 각각 한 건씩 전한다. 우선 자료 출처를 밝히지 않은 글이다. 몇 년 전 퇴계 이황과 관련된 자료를 찾으려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나온 뜻풀이다.

[이항복은 어린 시절 퇴계 이황의 옆집에 살았다. 어린 항복이 퇴계에게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왜 남자의 생식기를 ‘O지’라고 하고, 여자의 생식기는 ‘O지’라고 하는 것이옵니까?” 퇴계가 항복을 꾸짖지 않고 설명한다. “남자의 생식기는 앉을 때 가려진다 해 ‘좌장지(坐藏之)’라 하고, 여자의 생식기는 걸을 때 가려진다 하여 ‘보장지(步藏之)’라 한다. 이를 짧게 줄여 부르는 것이 O지와 O지이다.”]

어처구니 없는 설명이었다. 두 단어는 외래어였다. 오늘날 두 단어를 우리가 가끔 써야 할 때면 영어를 입에 올리는 것처럼, 많은 사회가 금기어는 외국어를 들여와서 쓴다. 조선시대도 비슷했다.

두 단어가 외래어라는 사실은, 두 단어가 조선시대 중국어 어휘집인 <역어유해(譯語類解)>에 표제어로 올랐다는 데에서 확인된다. 이 어휘집은 숙종 16년 때인 1690년에 사역원에서 간행했다.

두 단어가 중국에서 왔다고 해도 한자 표기를 위와 같이 했다면 위의 어원 풀이가 맞는 게 아닌가? 그렇지 않았다. <역어유해>에서 두 단어는 각각 한자(漢字) 두 글자로 표기됐고, 위의 표기와는 어떤 한 글자도 일치하지 않았다.

심재기 서울대 명예교수는 <국어어휘론 신강>에서 이 사실을 전하며 “당시 중국어에는 남녀 성기를 가리키는 다른 단어가 있었다”며 “따라서 두 단어는 중국에서도 외래어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나는 당시 이 희한한 낭설을 주위 분들에게 전하며, “퇴계의 일화는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어원 풀이는 엉터리이지만 퇴계가 어원을 틀리게 알고 그렇게 얘기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내가 본 뜻풀이에는 어떤 자료를 인용했는지 적혀 있지 않았다. 최근 이 대목이 궁금해 인터넷을 다시 검색해 여러 건을 읽어봤다. 어떤 필자가 점잖게 “퇴계 이황의 일화가 아니라 율곡 이이의 이야기”라고 알려준다. 다른 곳을 보니 출처가 나온다. <이야기 조선야사>라고 한다. 서점에 가서 이 책을 읽어봤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에 수록한 야사는) 설화적인 분식이 다분하고 확실한 근거가 부여되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참, 두 단어의 어원을 정확히 설명한 글은 인터넷에는 거의 없다. 내가 전에 블로그에 올렸지만 재미가 없어서인지 전혀 퍼지지 않았다.

정확한 사실은 묻히고, 대신 웃자고 풀어놓은 이 이야기가 그럴듯한 어원 풀이로 자주 인용된다. 세월이 흘러 언젠가는 이 어원이 정설로 자리잡게 될지 모를 일이다.


칼럼니스트 백우진 중앙일보시사미디어 전문기자, <안티이코노믹스><글은 논리다> 저자 cobalt@joongang.co.kr


[사진=시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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