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른답지 못한 어른들만 나오는 TV, 부끄럽다

[엔터미디어=정석희의 TV 돋보기] 타인의 결점이 자꾸 눈에 밟히고 거슬린다면 그 순간 나 자신에게 같은 결점이 있는 게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고 한다. 맞는 말이지 싶다. 요즘 들어 TV를 보다가 누군가가 유난히 불편하게 느껴질 경우, 그 대부분이 어른이 어른답지 못한 행보를 보일 때가 아니던가. 스스로 화를 다스릴 줄 모르는 어른들, 나이를 먹었어도 여전히 욕심에서 자유롭지 못한 어른들, 자신의 잘못을 선선히 인정하지 않는 어른들에게 날선 눈빛을 보내게 되는 이유는 아마 그러한 일면들이 여전히 내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인지 SBS <옥탑방 왕세자>에서 여길남(반효정) 회장이 박하(한지민)에게 느닷없이 따귀를 올려붙이는 장면은 충격이었다. 드라마에서 따귀야 이젠 예삿일이지만 여 회장으로 말하자면 한 집안의 어른이자 산전수전 다 겪었을 내로라하는 기업의 최고경영자가 아닌가.

그 자리에 오르도록 오죽이나 많은 모함과 시기에 시달렸겠나. 따라서 어지간한 권모술수에는 끄떡도 않을 인물이련만 어찌 된 일인지 비서 홍세나(정유미)의 거짓말에 홀딱 속아 자초지종 따질 새도 없이 손자 용태용(박유천)을 입히고 먹이고 거두어 준 은인에게 실례를 범했으니 이 무슨 어른답지 못한 처사인가 말이다.

물론 박하가 의도적으로 손자에게 접근했다고 전해 들었을 테니 울화가 치미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겠으나 평정을 잃지만 않았다면 의외의 소득을 얻을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2년 전 미국에서 전해 받았지만 그 엽서를 누가 줬는지는 알지 못한다.”는 박하의 답에 의구심을 품고 조목조목 따져봤다면 엽서에 붙어있는 메모대로 약속 장소에 나갔으나 용태용(박유천)이 나오지 않았었다는 사실도 들을 수 있을 테고 그로 인해 실종 사건의 실마리가 잡혔을 수도 있는 노릇이니까.

그러나 핏줄 앞에선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눈이 어두워지고 이성을 잃게 되는 모양이다. 오해를 받고도, 난데없이 따귀를 맞고도 어른인지라 대거리 한번 못하고 눈물을 훔치던 박하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박하 할머니가 살아 계셨더라면 할머니들끼리 머리채를 잡고도 남을 일이지 뭔가. 어쨌거나 한 노회한 인물의 어리석음과 무례함이 남의 일 같지 않아서 가슴이 답답했다.




이처럼 여 회장의 경우엔 몇몇 장면이 불편하게 다가올 뿐이었지만 아예 캐릭터 자체가 불만스러운 예도 있으니 MBC 새 일일시트콤 <스탠바이>의 류정우(최정우)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한 집안의 어른으로서, 가장으로서 모범을 보이기는커녕 매사 한심한 언행을 일삼는 인물이니까.

아들 류진행(류진)이 딱한 처지에 놓인 시완(임시완)이를 집으로 데려오자 분기탱천해 발길질까지 서슴지 않던 그가 기자가 취재를 나오고, 그로 인해 시완의 일이 선행으로 포장되자 이내 마음을 돌려 시완을 받아들이는 장면은 허탈하기까지 했다. 하기야 정치에 욕심을 품은 그에게 이만한 호재가 또 어디 있으리.

하지만 여전히 집안에서는 동화 속 계모처럼 구박을 일삼는가하면 고3인 시완이에게 자신이 경영하는 스파게티 가게 일을 거들라고 시키기까지 하니 도대체 이런 사람을 어찌 어른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앞으로 그가 얼마나 시완이 가슴에 못을 박을지 짐작만으로도 마음이 언짢다. 한편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아들과 결혼하려던 여자가 남긴 혈육을 선선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어쩌면 류정우는 이 세상 모든 어른의 속마음을 대변하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이들과 대비되는 인품 좋은 어른을 이 자리에서 소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꼬. 그러나 TV 속을 아무리 휘저어 봐야 도무지 찾아지지가 않는다. 젊은이들이 믿고 의지하고 어려움을 나눌 어르신들은 대체 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까.

심지어 왕실이 신뢰하고 시청자 또한 믿어 의심치 않았던 MBC <더킹 투하츠>의 비서실장 은규태(이순재)조차 이중적인 모습을 드러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나. 은규태의 고뇌가 심히 눈에 거슬리는 건 나 또한 같은 입장에 처했을 때 그와 다름없는 선택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닐는지.




진실을 은폐하고자 애쓰는 부도덕한 모습, 그 나약함이 바로 이 시대를 사는 어른들의 현주소이지 싶어 못내 마음이 쓰인다. 지금은 자신의 실수가 선왕 부부의 죽음을 돕는 셈이 되었다는 사실을 차마 밝히지 못하는 그에게 뭔가 숨겨진 또 다른 궁리가 있기를 바라는 이유는 그가 현재 젊은 왕 이재하(이승기)가 마음을 의지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믿고 따르고 기댈 어른의 부재만큼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 있으리. 그러나 젊은이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선 진심이 담긴 사과가 필수. 부디 은규태 그도, 용태용의 할머니 여 회장도, 철딱서니 없는 아버지 류정우도, 때를 놓치지 말고 격을 제대로 갖춘 사과를 해주길 바란다. 지나치게 혼란스러운 세상, 드라마에서라도 존경할 수 있는 어른을, 최소한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는 알고 반성하는 어른을 만나고 싶으니까.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freechal.com
그림 정덕주


[사진=SBS,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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