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판석 PD “김희애 때문에 연출 노선 바꿨다”

[엔터미디어=조민준의 드라마 스코프] "돈이 사랑을 이겨요? 없어도 비비적대며 사는 게 사랑이지. 열심히 일하고, 하루 일과 끝나면 같이 발 씻고 모여앉아서, 삼육구를 하든 쥐잡기를 하든 같이 좀 웃다가 자고, 그렇게 살면서 부족한 것, 불편한 것 있으면 국가에 요구하면 되지. 그게 국가가 하는 일인데." <아내의 자격> 13회에서 윤서래(김희애)에게 다소 공격적으로 프러포즈하던 김태오(이성재)의 대사다.

그리고 이 13회가 방송된 때는 4월 11일, 즉 제 19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던 날이었다. 이성재가 열변을 토하던 그 순간에도 영상 하단에는 각 지역구별 개표 현황이 시시각각으로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극 중 대사가 극 바깥의 현실과 공명한 이 기막힌 우연의 순간은, 그 의도와 관계없이 드라마 <아내의 자격>이 남긴 가치와 미덕을 단 한 프레임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별세계 속 인물들이 아니라 섬뜩하리만치 생생한 캐릭터들과, 마치 현실의 거울상 같은 사건들. 2012년 오늘날 한국 사회의 혼돈스런 단면과 그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냉철하고도 절제된 시선으로 담아낸 연출가 안판석을 종영 직후에 만나, 그 치열했던 노정을 복기하는 기회를 가졌다.

<아내의 자격> 기획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 "원래 법조 드라마를 하고 싶었는데 준비하다보니 시간이 너무 걸리겠더라. 취재를 충분히 해야 하는데 당시 빨리 작업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작가인 정성주 선생과 상의하다 보니 비교적 쉽게 착수할 수 있는 장르가 멜로드라마였다. 그렇게 대본을 두 권 정도 진행했는데 정 선생이 참 잘 써서 내용은 좋지만 그릇이 좀 작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물들이 너무 고결하달까. 두 사람을 지상으로 내려오게 한다면 드라마 <아줌마>의 세계 속에 있는 인물들처럼 되지 않을까? 그런 말씀을 드렸더니 정 선생도 바로 알아채시고 동의하셨다. <아내의 자격>의 큰 틀은 그 자리에서 그렇게 만들어진 거다."

그렇다고 해도 강남 학원가의 실태 같은 것은 상당한 취재가 필요한 부분 아닌가?

- "그건 별로 어렵지 않다. 애를 키워보면 안다. 왜냐하면 어려운 분야이기도 하고 부모 스스로도 불안하니까 공기 중에 떠다니는 ‘누구는 어떻게 가르친다더라.’는 식의 말들이 귀에 저절로 들어온다. 세상의 어떤 정보도 공기 중에 다 떠 있다. 하지만 인간은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한다. 아이가 생기면 교육과 관련된 정보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요즘은 대치동이 어떻다느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무척 예민한 상태기 때문에 수치 같은 것도 그 자리에서 다 외워질 정도다. 그러니까 이 드라마에 나오는 내용은 별도의 취재가 필요 없었다."

<아내의 자격>은 마치 사전제작 드라마들처럼 대본이 완결성을 갖추고 있는 느낌이었다. 사전에 얼개를 매우 치밀하게 짰을 듯한데.

- "인물 구도만 만들어놓고 그냥 그들의 발뒤꿈치를 쫓아가보자 하고 시작했다. 그 외에는 아무 계산이 없었다. 다만 생각을 익히는 시간은 꽤 오래 걸렸다. 그리고 방송 나가는 거 보면서, 시청자들 반응 봐가면서 드라마를 끌고 가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오로지 극중 인물들만 쫓았다. 그렇게 해서 방영 시작 전에 8~9회까지 대본을 썼고, 방송 시작 후에 수정한 것도 없다."

<아내의 자격> 방영 전에 만났을 때 “걔의 운동권 논리를 내가 다 만들어줬잖아.”라는 한상진(장현성)의 대사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다. 방송을 보니 10회 지나서 그 대사가 나오더라. 그래서 사전에 대본을 상당히 많이 준비한 것으로 생각했다.

- "거기까지 대본을 써 놓은 것은 아니었다. 정성주 선생과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나누었는데, 한상진 캐릭터는 진화하는 인물이 아니고 전형성 속에서 존재하는 인물이다. 1회만 봐도 다 알 수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가끔 심심할 때는 그 인물이 할 법한 이야기들을 떠올리면서 정 선생과 깔깔대곤 했다. 진화가 안 되는 인물이니까 너무 쉽다. 하다못해 오늘자 신문만 봐도 한상진이 할 법한 대사가 보인다. 아무 자기계발서를 펴 봐도 있고. 한상진은 어디나 있다."

시청자의 반응에 대본을 수정하지는 않았다고 했는데, 현장에서 배우들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은 없는가?

- "많이 있다. 미리 쓴 대본을 고친 건 아니지만 뒤늦게 반영한 것도 있고, 촬영하면서 주의를 기울이게 된 것도 있다. 특히 김희애가 너무 잘 해서 화면에도 변화가 생겼다. 다채롭게 컷을 나누고 여러 구도로 인물을 보여주리라고 생각한 장면들이 있었는데 김희애의 연기를 보고 그냥 인물을 바라보도록 해보자고 생각하게 됐다."



<아내의 자격>에서 일관되었던 관조적인 화면들이 그렇게 만들어졌다니 놀랍다. 배우로 인해 연출 노선이 바뀐 셈 아닌가.

- "그렇다. 배우가 미학을 결정한 셈이다. 드라마 연출의 원칙 중에 이런 게 있다. 실생활에서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행동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행동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카메라를 들이대면 부자연스럽게 행동하기 시작한다. 먼저 손부터 부자연스러워진다. 그런 부분이 드러나기 때문에 연출자는 가급적 그것을 가려야 한다. 그래서 TV 드라마를 보면 전체 컷의 8할을 바스트나 클로즈업 숏이 채운다. 물론 인물이 예쁘게 생겨서 그럴 때도 있고 특정 대사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바스트 숏 중심으로 간 이유는 더 보여주면 부자연스럽다는 이유가 훨씬 컸었다. 넓게 보여주면 부자연스러움이 드러나니까 좁히고 좁혀서 보여줬는데, <아내의 자격>에서는 점점 넓어진 거다. 그렇게 온 몸을 보여주는데도 배우가 모든 신체를 통해 표현을 하고 이야기를 하더라. 그리고 그걸 편집으로 끊지 않고 바라보고 있으면 압도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렇게 촬영현장에서 미학이 정립된 거다."

<하얀 거탑>의 화면과 비교하면 그 대비가 더 명확하게 다가온다. 극단적인 클로즈업도 불사한데다 빠른 편집으로 이루어졌던 <하얀 거탑> 시절의 화면에 대해 당시 “드라마 자체가 사건이 강한 편도 아니고 대사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화면의 스펙터클이 필요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아내의 자격>에 이르러서는 굳이 그런 연출적 기교를 통하지 않고도 스펙터클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이다.

- "맞다. 드라마가 잔잔하다고 해도 내적인 스펙터클은 있어야 하는데 그걸 찾는 내 눈이 진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덜 촐싹거리게 되었고. 넓게, 끊지 않고도 충분히 힘을 보여줄 수 있다면 연출자가 믿고 밀어붙이면 된다. 좋은 것 다 해보려고 오락가락하면 안 된다. 그래서 연출 컨셉트가 확고해야 한다."

카메라가 꿈쩍도 하지 않고 단지 지켜만 볼 뿐인 화면들 중에는 1회에서 태오가 서래의 자전거를 끌고 저 멀리서 천천히 다가오던 명장면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상당한 결심이 필요했을 롱 테이크 장면일 듯한데.

- "아득히 먼 곳에서 점 같은 게 움직이는데 처음에는 저게 누군지, 자전거를 가지고 오는지도 모를 정도다.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카메라를 뻗쳐놓고 기다려야 하는데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사실 겁이 나서 못할 장면이다. 그런데 그렇게 실시간으로 찍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서래와 태오가 가까워지는 게 다른 드라마들처럼 7~8회 무렵이 아니고 1회에서 서로를 바로 알아봐야만 한다. 그 정서를 편집이나 인위적인 장치로 보여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객이 이 장면을 지루하지 않게, 오히려 가슴 떨리는 느낌으로 본다면 성공이라고 봤다. 편집자도 겁을 먹고 짧게 축약을 시켰는데 내가 원래대로 내버려두자고 했다."



배우 김희애의 연기력이야 정평이 나 있는데다 이번에도 실로 놀라운 연기를 보여주었다. 다만 이성재의 경우는 최근 몇 년간의 행보가 다소 아슬아슬하게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늘 예민하거나 버럭하는 이미지들만 봐 온 느낌이니까. 태오라는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한 모습을 보면 연출가들이 다소 천편일률적으로 배우를 낭비해 온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 "이성재와는 연출 데뷔 무렵에 처음 만났다. 그때는 MBC가 공채 탤런트를 뽑을 때였고 이성재가 24기 신입이었다. 드라마 현장에서 단역이 필요할 때 신입 탤런트들을 불러서 가마꾼처럼 작은 역할도 시키곤 했는데, 그럴 때도 연기를 잘 하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이 보인다. 이성재는 참 자연스럽게 잘 했다. 그 자연스러운 모습이 이성재에게 있기 때문에 <아내의 자격>에서 함께 하게 되었고 참 잘했다."

태오의 직업이 치과의사여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서래가 사는 곳이 강남이니만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 같긴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판타지적인 설정처럼 보일 수도 있다.

- "일단 상대 남자는 중산층이어야 했다. 중산층, 전문직에 안정된 삶을 사는 직종이 여러 개가 있다. 변호사, 검사, 외과의사, 성형외과의사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하나하나 생각해 보자. 변호사? 음습한 길에 발을 딛지 않고 어떻게 그 일을 할까? 저녁 약속도 많을 것이고. 외과의사?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언제라도 달려가야 한다. 흔치 않게 치과의사는 아침 아홉 시에 출근해서 저녁 여섯 시에 퇴근하면 된다. 안정된 생활 속에서 예측가능한 삶을 사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런 생활을 오래도록 하게 되면 아주 작은 오류도 두려워지게 마련이다. 드라마에서는 인물의 낙폭이 클수록 가슴이 덜컹거린다. 치과의사는 절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여배우 캐스팅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배우가 불륜의 주인공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깜짝 놀랄까? 기사를 다 챙겨보고 싶을 만큼? 나한테는 그게 김희애다."

태오의 화법은 어쩐지 옛날 사람 같은 느낌이 있다. ‘~면’을 ‘~믄’으로 일관되게 발음한다든지, ‘~한다 말입니다’는 식. 속도 중심의 현 세태와는 거리를 두고 있는 인물이라서일까?

- "내가 의도한 건 아닌데, 정 선생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태오가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장면들은 나를 생각하면서 쓰셨다고. 어떤 주제를 놓고 이야기할 때 그런 식의 단정적인 화법이 나온다고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웃음)"

그리고 <아내의 자격>에는 두 명의 전직 아나운서들이 배우로 출연했다(최은경, 임성민). 연기도 연기지만 강남이라는 공간과 맞아떨어지는 이미지가 주요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 "아나운서들은 그 직업을 통해서 상황에 따라 어떤 옷을 입어야 한다든지 하는 것을 체득하는 게 있다. 그렇게 직업생활에서 배운 것들이 드라마에 필요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강남의 느낌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말투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안판석 PD와의 인터뷰는 2편으로 이어집니다)


칼럼니스트 조민준 zilch92@gmail.com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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