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당신에게 쓴 서신인 동시에 나에게 쓰는 글이요. 내가 이 글을 썼다는 것을 잊을지도 아니면 이 글조차 존재가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내가, 아니면 당신이 혹시나 기억을 붙들고 살게 될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쓰는 글. 내가 이 부적을 우연히 얻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인과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소. 이제야 뒤늦게 깨닫게 된 인과는 목숨을 구한 인으로 내 모든 것을 잃어야 하는 것이 그 과였소. 나의 미래, 나의 명예, 나의 가치관, 내 사람들, 그리고 당신까지. 목숨을 얻으려면 다른 모든 것을 잃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어쩌면 당연한 이치였소. 그중에 하나쯤은 갖고 갈 수 있다고 믿은 내가 어리석었을 뿐. 어디까지 잃어야 대가를 다 치르는 것일까. 기억, 우리들의 기억. 그것이 내가 잃어야 할 마지막 대가. 이제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겠소. 우리가 서로를 잊고 살게 될지, 아니면 기억을 놓지 못하고 괴로워하게 될지. 마지막 바램이라면 나는 당신을 기억하고 싶소. 목표도 없는 여생에 그 기억조차 없다는 건 지옥일 듯해서. 그리고 당신은 훗날 이 글을 혹시나 읽게 되더라도 누구를 향한 서신인지조차 깨닫지 못하길 바라오.”

- tvN <인현왕후의 남자>에서 김붕도(지현우)의 서신

[엔터미디어=정석희의 그 장면 그 대사] 올해 들어 수많은 드라마들이 앞 다퉈 쏟아져 나왔고 또 나올 예정이지만 그중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우뚝 세워 칭찬하고 싶은 tvN <인현왕후의 남자>가 16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성장한 자식을 결혼시켜 떠나보내는 부모의 심정이랄까?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긴 해도 뿌듯함과 안도감을 주는 마지막 회였다고 감히 말하련다.

초반에 옴짝달싹 못하게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았다가 중반을 넘는 사이 초심을 잃기 시작해 실망 가득한 결말을 내놓는 예가 태반인 요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한 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이런 드라마의 등장이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겠나. 엄청난 물량이 투입된 장면은커녕 남녀 주인공 지현우, 유인나 외에는 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연기자들이 극을 이끌었으나 그럼에도 부족하거나 허술하게 느껴지지 않았으니 앞으로 드라마를 제작할 많은 이들이 눈 여겨 봐야 옳지 싶다. 잘 짜인 극본과 탄탄한 캐릭터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 <인현왕후의 남자>. 작고한 영화평론가 정영일 씨가 명작을 예고할 때 쓰시던 표현을 빌려오자면 ‘놓치면 후회할’ 작품이다.

주옥같은 장면과 대사들이 많았지만 그중 300년 전의 세상에서 김붕도(지현우)가 2012년의 연인 최희진(유인나)에게 남긴 이 서신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건 한 장의 편지에 우리가 흘려보내서는 안 될 많은 것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좌절했던 나의 꿈을 이루는 것이 그 과라고 생각했고 그 다음엔 당신을 만나 인연을 잊는 것이 그 과일지 모른다고 여겼고, 그 다음엔 다른 세상에서 새 인생을 사는 것이 과라고 생각했으나 이제야 뒤늦게 깨닫게 된 인과는 목숨을 구한 인으로 내 모든 것을 잃어야 하는 것이 그 과였소.”











신통방통한 부적 덕에 수차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그로 인해 결국 죽은 사람이 되어 팔도를 떠도는 신세가 된 김붕도가 아닌가. 남의 얻을 수 없는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그저 얻게 된다면 그 대가로 어쩌면 자신이 갖고 있었던 모든 걸 송두리째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많은 것들 중에 하나쯤은 가지고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버리는 편이 옳다는 사실, 우리는 왜 이 중요한 진실을 늘 잊고 사는지. 붓을 놓은 후 그는 연인 희진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 마지막 희망인 부적을 태워버렸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범인으로서는 차마 도모하지 못할 일이지 싶다. 진정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이 남자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갈 곳이 없어 타고 있는 말이 이끄는 대로 살아온 한 해, 도망치는 목표라도 없었으면 어찌 살았을지 모를 나날, 그에게 1년은 아마 지옥 같은 하루하루였으리라. 자신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살고 있는 희진이 자신을 말끔히 잊길 바랐던 남자, 김붕도. 그는 명예롭게 죽기위해 희진과의 추억이 담긴 넥타이로 옥중에서 목을 맸다.

그런데 그 순간 놀랍게도 300년의 시간을 관통하여 희진에게서 걸려온 휴대폰 벨이 울리고 살아야 할 목표가 생긴 김붕도는 스스로 만들어 쓴 올가미를 벗어버린다. 그리고 휴대폰을 손에 쥐는 순간 돌아왔다! 희진의 진심어린 염원이 지난 날 윤월(진예솔)의 염원이 담긴 부적이 김붕도의 목숨을 구했고 다른 세상으로 보내줬듯이 2012년으로 김붕도를 다시 부른 것이다. 그러나 희진의 기억을 되살려낸 것은 그가 절절한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눌러쓴 이 서신이 아니겠나. 결국 어떻게든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라는 걸 두 연인의 재회를 통해 알려준 <인현왕후의 남자> 출연진과 제작진에게 다시금 고마움의 인사를 전한다.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freechal.com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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