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것은요. 세계인 중에 트래킹 올라가가지고 병째 양주를 시켜 먹는 사람은 유일하게 코리안! 병째 먹으면서 4박 5일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찍어요. 그렇게 하려면 그냥 북한산 올라가는 게 나아요. 돈도 적게 들고. 우리나라 산악인이 현재 1000만 명이 훨씬 넘잖아요. 많은 사람들은 산을 러닝머신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도가니 좀 튼튼하게 하겠다고. 일주일 할 운동해야 한다나. 막 올라갔다 내려와서 막걸리 확 먹고 오욕칠정을 막걸리로 풀어버리고 취해가지고 자버려요. 그건 별로 건강에 도움이 안 돼요. 그렇게 하면. 물론 러닝머신 타는 것도 안타는 것보단 낳지요. 그래도 산이라는 건 좀 생각도 하고. 나는 트래킹의 기본 원칙은 ‘홀로 걷되 함께 걷는다‘에요. 일행이 있으면 앞뒤에서 아는 이의 발걸음이 들리고 목소리가 들리면 좋아요. 편안하고. 그렇지만 그 사람하고 계속해서 얘기를 하고 가면 홀로 있을 수가 없잖아요. 가끔 괜찮아? 묻고, 열 걸음 떨어져서 괜찮아. 대답하고. 홀로 걸으면서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함께 걷고 있다는 느낌. 나는 우리 사회도 그렇게 변했으면 좋겠어요.”

_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 한가>에서 박범신의 한 마디

[엔터미디어=정석희의 그 장면 그 대사] 시청률이 떨어졌다며 언론에서는 온통 수선들을 피웠지만 나는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 한가> ‘박범신 편’이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살아오는 동안 내내 품고 있던 많은 의문들, 답답증이 덕분에 꽤 많이 해소됐기 때문인데, 무엇보다 등산 문화에 대한 속 시원한 지적에는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근교 산에 한번이라도 올라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얘기가 아닐까? 남의 엉덩이를 보려고 오르는 산인지, 뒤통수를 보려고 오르는 산인지,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줄을 지어 꾸역꾸역 올라갔다가 정상을 찍고 나면 경치 구경은 5분? 10분? 이내 내려오기가 바쁘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산을 러닝머신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이 러닝머신이라는 표현, 얼마나 절묘한가.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산 아래에서 벌어지는 술판. 그렇게 술 한 잔 걸치고 지하철에서 배낭을 내팽개친 채 널브러져 있는 이들을 목격한 게 한 두 번이어야지. 듣자니 이 술타령은 국내에서 뿐만이 아니라 해외 원정 등반을 가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하기야 집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선들 안 새겠나. 등산인 1000만 시대에 돌입했다고는 하나 아직 상식도 원칙도 없는 상황. 박범신 작가가 알려준 등산의 기본 원칙, ‘홀로 걷되 함께 걷는다’가 상식으로 자리 잡는다면 오죽이나 좋을꼬.







그리고 이어진 우리 사회도 ‘함께 가되 홀로 가고. 홀로 가되 함께 가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얘기 또한 가슴을 파고들었다. “지금은 함께 아니면 적이에요. 우리나라에는 너무 중간의 목소리가 없어요. 왜 중간의 목소리가 없겠어요. 우리들 가슴 속에는 다 중간의 목소리에요. 보통의 사람 우리들은.” 이 역시 무릎을 칠 말씀이다. 인생은 하나의 봉우리를 향해 모두가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작더라도 자기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는 봉우리를 가꾸는 것, 그러나 이웃 봉우리들과 함께 있는 것이라는 말씀에 지금껏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된다. 산에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남을 따라 잡느라, 어떻게든 정상에 오르겠다며 아등바등 살아온 세월, 후회막급이랄 밖에.

사실 고백하자면, 소설 ‘은교’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를 접했던 터라 작가가 드러낸 오욕칠정에 대한 오해가 좀 있었다. 과년한 딸을 둔 입장에서 선입견으로 중무장을 하고 노인의 사랑을 바라봤지 싶은데 방송을 본 후 서둘러 책을 읽었더니 비로소 시인 이적요의 마음이 짐작이 되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게 이해가 되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나아가 작가가 말한 ‘불멸의 스카이라인’을 만나러 히말라야로 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엉뚱한 데에 힘 많이 줬다는 후회가 막 밀려와요. 내가 서울에서 그 사람을 왜 그렇게 미워했지? 뭐 그거 가지고. 시청률 5프로와 10프로 사이는 죽음과 삶처럼 큰 차이일 거예요. 방송인들이 볼 때는. 히말라야에서 열흘만 걸으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나도 눈물 한 바가지 흘리고 난 뒤 모든 걸 내려놓게 될까?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freechal.com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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