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학을 권합니다.

[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미국 스탠포드대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는 학생 약 30명이 최근 중앙일보를 방문했다. 나는 중앙일보 미디어 네트워크를 소개하고 비전을 설명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최근 이코노미스트 두 호를 들고 갔다.

중앙일보 측 참석자가 각자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 두 호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백우진입니다. 중앙일보의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를 만듭니다. 이코노미스트는 제호 그대로 경제를 다룹니다. 다만, 영국 이코노미스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좋은 방문 되기 바랍니다.”

이렇게 매끄럽게 말하진 못했다. 하지만 영국 ‘디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와의 관계를 말하는 대목에서는 좌중에서 웃음이 조금 터졌다. 다중 앞에서, 그것도 초면의 외국인과 구면의 내국인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영어로 말하는 일은 힘든 일이다. 내겐 특히 어려운 일이다.

초면의 외국 사람과 대면한 자리는 불편하다. 한 컨설팅 회사 간부는 “어떤 기업은 그 어색함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폭탄주를 돌리기도 한다”고 들려줬다. 회의실에 앉은 다음 ‘한국식 상견례’라면서 폭탄주를 서너 순배 돌린다. 그러면 알코올 기운이 퍼지면서 초면인 사람들 사이의 긴장을 녹인다는 것이다. 그 간부는 “외국 사람들도 한국식 상견례를 이미 들어 알고 있기 때문에 별 거부감 없이 따라 한다”고 말했다.

그런 자리에선 ‘쓸모없는 지식’이 유용하다. 몇 년 전 포브스코리아 편집장으로 일할 때였다. 포브스는 라이선스를 준 해외 지역판 편집장을 매년 한 차례 불러모아 제작 노하우를 ‘전수’해주고 교류를 확대할 방안을 논의한다.

터키에서 열린 행사에서 점심 식사를 하는데 내 옆에 레바논 출신 여성이 앉았다. 그는 포브스 측 참석자였다. 나는 그에게 “레바논 출신이라니 반갑다”며 “레바논 출신 사업가가 많은데, 닛산을 살려낸 카를로스 곤이 있고, 스와치와 스위스 시계산업을 부흥시킨 하이예크가 있지 않으냐”고 말을 건넸다.

반가워하길래 한 마디 덧붙였다. “레바논 사람들은 옛날옛적 페니키아 시절부터 지중해를 누비며 무역을 주름잡았다. 특히 최초로 알파벳을 고안해낸 레바논 사람들에게 서양 문명은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는 “어찌 그런 걸 다 아느냐”며 반색을 한다. (뭘 그 정도 가지고, 흠.)

사람에 따라서는 잡학을 교류의 소재로 쓰는 데 그치지 않고 비즈니스의 윤활제로 활용하기도 한다. 영문학을 전공한 어느 기업인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경험을 들려줬다. 상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맥락과 내용은 그 분 말과 별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대학에서 뭘 전공했는지 화제에 올렸어요. 그 사람도 영문학을 공부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라는 책 이름의 유래를 아느냐고 물어봤죠. 모른다고 하길래, 그 문구는 중세 영국 시인 존 던(John Donne·1572~1631)의 작품에서 나왔다고 알려줬죠. 그러고 나서 그 시의 일부를 읊었어요.

…any mans death diminishes me, because I am involved in Mankinde: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어떤 사람의 죽음이라도 나를 감소시킨다. 나는 인류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게 누구를 위해 조종(弔鐘)이 울리느냐고 묻지 말라. 조종은 지금 그대를 위해 울린다.

이렇게 말한 다음 덧붙였죠. ‘우리는 세상이고, 우리는 하나다. 그러므로 우리 오늘 비즈니스 잘 풀어보자.’

다른 기업인은 프랑스 출장 때, 청소년 시절 여러 번 읽어 주요 내용을 암기하다시피 한 나폴레옹 전기 덕을 크게 봤다고 에세이에 썼다.

과거 선배들에 비해 요즘 입사한 사람들은 상식이 부족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상식은 연륜과 경험으로 축적되는 것이니. 그렇지 않은 측면도 있다. 요즘 사람들의 상식은 인터넷 초기화면에서 거론되는 주제를 중심으로 확장되는 게 아닌가 싶다.



얼마 전 모임에서 한 참석자가 ‘세대차이’를 주제로 다음 얘기를 꺼냈다.

“얼마 전에 말이야, 내가 험프리 보가트 얼굴이 그려진 넥타이를 매고 회사에 갔어. 그런데 우리 실에 근무하는 젊은 직원 중 아무도 험프리 보가트를 모르는 거야.”

내 생각엔 그건 세대차이뿐 아니라 상식의 차이도 작용한 결과다. 험프리 보가트를 몰라도 일을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왕이면 고전의 반열에 오른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먼 주연 영화 ‘카사블랑카’ 쯤은 본 편이 낫지 않을까? 아울러 그런 상식을 만남에서 자연스럽게 활용하는 사람이면 더 좋지 않을까? 당신이라면 어떤 사람과 함께 일하겠는가?

잡다한 지식은 쓸모가 많다. 특히 그 지식을 상황에 맞춰 적절하게 풀어내는 재치는 상대방과 나를 편하고 즐겁게 하며, 일도 잘 풀리게 한다. 앞으론 입사시험에서 스펙을 따지기보다 폭넓은 상식부터 확인하는 게 어떨까 싶다.


칼럼니스트 백우진 <이코노미스트 편집장> cobalt@joongang.co.kr


[사진=오상진 트위터, 영화 '카사블랑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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